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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워즈워드의 세계 (영국 기행 중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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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1770-1850)의 세계

        호수지방에 산재해 있는 20여개의 호수 가운데 가장 큰 윈더미어 호(미어,mere 가 호수란 뜻이라 역전 앞 같이 되었지만)의 선착장에서 배를 탔다. 호수 지방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제공할 사명감 같은 것을 가진 임재훈은 우리를 선착장에 내려준 후 차를 가지고 배로 약 30분 거리인 다음 마을인 앰블사이드에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배는 호수지방의 산과 구릉을 멀리서 바라보며 북쪽으로 올라갔는데 배위에서 바라다보는 경관도 일품이었다.

우리가 바라보는 저 산야를 워즈워드는 부지런히 걸어 다니면서 바위나 나무, 풀과 꽃, 새와 양들에게서 시적 영감을 얻었다. 그와 가까왔던 토머스 드 퀸시(1785-1859, 영국 아편 중독자의 고백 의 작가)는 워즈워드가 생전에 28만 내지 28만 8천 킬로미터를 걸었다고 했다. 이 거리라면 태어난 날부터 걷기 시작해서 죽는 날 까지 매일 10 킬로미터를 걸은 것이고 20세부터 60세( 철 들었을 때 부터 기운이 남아 있을 때 )까지만 치면 1년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20 킬로미터를 걸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기는 호수지방에서 와이 강이 어디인가, 우리가 자동차로 가는데만 10시간은 걸린 거리 아닌가! 이 거리를  두 번씩이나 왕복했다면 28만 킬로미터가 허풍만은 아닌 듯 하다. 꼭 물위라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는데 바람이 거세지고 추워저서 우리는 실내에 자리를 잡았다. 어제부터 들고만 다닌 내 캠코더를 보다 못해 인계받아 사용법 연구를 끝낸 미즈 윤이 식전 산책 때부터 촬영을 시작하더니 본격적으로 카메라 맨이 되어 실 내외와 배의 앞 뒤를 들락거리며 촬영에 열중했다.

        워즈워드는 시의 형식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였을 뿐 아니라 그때까지는 아무도 거들떠 보거나 언급하지도 않은 주제인 자연을 찬미하였다. 당시 시에서 자연을 그린 것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대부분 버질이나 호라티우스의 라틴시의 내용과 형식을 모방한 목가풍의 전원시나 정원이나 식물원 풍의 깔끔한 자연을 노래한 것으로 그나마도 숫자는 미미했다. 워즈워드는 수선화( Daffodils), 나비( To a Butterfly), 뻐꾸기( To the Cuckoo), 종달새( To a Skylark), 데이지( To the Daisy) 심지어 애기똥풀( To the small Celandine)에게서 까지 영감을 얻고 그런 것 들을 시의 고귀한 소재라고 선언한 셈이다. 그의 시들은 단순히 자연의 즐거움을 표현한 것이 아니고 배후에는 자연에 대한 그의 심오한 철학이 자리잡고 있다. 시인은 자연(그는 이 자연이 무엇보다도 새,시냇물, 수선화 ,양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이 도시의 삶으로 인한 심리적 피해를 치료하는 불가결한 약이라 생각한다.

“사람과 사물들의 떠들썩한 세계” 즉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같은 저열한 감정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반면 자연은 “올바른 이성의 이미지”로서 도시생활의 뒤틀린 충동을 진정시킨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바이런 조차도 어른이 꽃과 동물에 대하여 그런 주장을 펼칠 수 있다는데 놀라 “ 이런 감상적이고 유약한 시---요람에서 우는 아이나 달래주는 노래를 모방한것-----”이라고 하였고 에딘버러 리뷰의 편집자들도 “유치하고 터무니 없는 작품”이라고 조롱을 해 댈 정도로  워즈워드의 이름은 발에 밟혔으나 1820년이후 부터는 독서대중은 비웃음을 거두고 그의 시에 매혹되고 그런 시들을 암송하기까지 하였다.

워즈워드의 시는 그 시에 영감을 준 곳으로 관광객들을 끌어 들여 1845년에는 호수지방에는 양의 숫자보다 관광객의 숫자가 더 많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였다.  사람들은 라이덜 마운트(워즈워드가 37년간을 살다가 타계한 집)의 정원을 거니는 그의 모습을 잠시라도 보는 것을 귀한 경험으로 삼았으며 그의 시에 묘사된 비탈과 호숫가를 헤매며 그가 언급한 힘을 찾으러 다녔다.

      앰블사이드에서 배를 내려 대기하고 있던 차를 타고 그래스미어 호숫가의 그래스미어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라이덜 마운트가 있는 라이덜 마을이 있었지만 그냥 지나갔다. 그래스미어 마을의 북쪽에 있는 비둘기 집( Dove Cottage)이 워즈워드가 29세부터 9년간 ,그의 시작 활동이 가장 왕성했을 때 살던 집으로 어렸을 적 이웃이던 메어리 허친슨 Mary Hutchinson 과 결혼하여 세 아이를 키우면서 "소박한 생활에 고상한 사색"( Plain Living, High Thinking)을 하던 집이다. 뒤쪽으로 꽃이 있는 정원이 딸린 하얀 회칠을 한 작은 돌집이다. 이미 캠코더로 촬영을 하던 미즈 윤이 내게 한 말씀 하란다. 하지만 무언가 목에 치미는게 있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집 안에 들어가자 자원봉사자 할머니가 우리를 포함해서 십여명의 관광객을 열성적으로 안내했다.  창문의 수가 적고(360년전 집을 지을 당시에는 창문이 7개가 넘으면 창세를 내야 했단다) 천정이 낮아서 집안은 어둠 침침하다. 워즈워드가 대낮에도 불을 켜던 촟대가 그대로 남아있다. 당대에는 창문으로 그래스미어 호수가 보였다는데 지금은 주변의 집들에 가려저 보이지 않는다.        

안내인 할머니의 입에서 나온 " Plain Living, High Thinking" 이란 책 에서나 읽었던 말이 얼마나 감격적으로 들리던지--- 내가 언제 어떻게 워즈워드를 접하고 좋아하게 됐는지는 기억이 없지만 그 때 부터도  그 귀절이 얼마나 내 마음에 와 닿았던지, 그리고 평생 좌우명처럼 간직하고 살아온 그 귀절을 이 워즈워드의 비둘기 집에서 귀로 듣다니!!! 아이들이 초,중등학교 때 쯤 학교에서 가훈을 써오라면, 워낙 뼛대가 없어서 가훈 같은 것은 없는 집이라 나는 대신 이 귀절을 적어 보낸 적도 있었다.

      1층 벽에 걸린 액자속의 글은 시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계관시인(Poet Laurete)임명을, 영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시작이 불가능 하다는 핑계로 사양하자, 의무적으로 시를 안 써도 된다는  왕세자(Prince of Wales)가 보낸 설득의 편지다. 이 편지를 읽고 나는 더욱 워즈워드가 자랑스러워 졌다. 이전에 토마스 그레이 Thomas Gray란 시인이 이런 최고의 영예를 산뜻하게 사양해 버린 적이 있어서 더욱 그랬다. 그런 조건하에서 인지는 몰라도 워즈워드는 1843년 로버트 사우디의 뒤를 이어 계관시인이 되었다. 워즈워드가 사양하였던 이유는 워즈워드 다음에 계관시인이 된 대 시인 테니슨이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50년을 맞아 쓴 시와 같은 날 같은 주제로 쓴  훨씬 덜 유명한 A.E. Houseman의 시를 비교해 보면 확연하다.(일부 발췌)

 

On the Jubilee of Queen Victoria.png

           

 

On the Jubilee of Queen Victoria  

(빅토리아 여왕 즉의 50주년에 부쳐)

Alfred Lord Tennyson


II  She beloved for a kindliness
     Rare in fables or History,
     Queen, and Empress of India,
     Crown'd so long with a diadem
     Never worn by a worthier,
     Now with prosperous auguries
     Comes at last to the bounteous
     Crowning year of her Jubilee---

IX  Fifty years of ever-broadening Commerce!
 Fifty years of ever-brightening Science!
     Fifty years of ever-widening Empire!


어떠한 전설이나 역사에서도 보기 드물게 온정의 여왕으로 사랑을 받으셨고
이렇게 오랫동안 군림하시는 인도의 황제를 겸하신 우리 여왕 같이
훌륭하신 여왕이 또 있으랴!
지금 풍요로운 전조와 더불어 마침내 즉위 50 주년 새아침이 밝아 오누나---
 

 

무역이 끊임없이 불어 간 50년!
과학이 끊임없이 발전해 간 50년!
대영제국이 끊임없이 넓어져 간 50년!

                             A. E. Houseman

ILook left, look right, the hills are bright,
     The dales are light between,
     Because 'tis fifty years tonight
     That God has saved the Queen.

IV  To skies that knit their heartstrings right,
      To fields that bred them brave,
   The saviors come not home Tonight:
      Themselves they could not save.

VIII  Oh, God will save her, fear you not:
      Be you the men you've been,
      Get you the sons your fathers got,
      And god will save the Queen.


전후 좌우의 모든 산에 봉화가 비치고 그 밑의 골짜기도 모두 환하다.
오늘은 하나님이 우리 여왕을 지키기 시작한지 50 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여왕을 지키며 죽어 간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지키지 못하였기에,
그들의 마음을 살찌우고 용감하게 길러준 고향에 오늘 저녁 돌아오지 못하였도다.

오호라, 여왕은 하나님이 지켜 주시니 너희는 걱정 말고 옛 모습으로 살아 나거라.
여왕은 하나님이 지키실테니 너희들은 다시 한번 네 아비의 자식으로 환생하여라.

 
나라 녹 받으면서 의무적으로 쓴 용비어천가와 경하스런 날을 맞아 축제의 분위기에서도 바로 그날의 영광을 위해 죽어간 마을의 청년들에게 생각이 미쳐 가슴에서 우러나온 시의 차이가 바로 워즈워드가 계관시인을 사양한 이유일 것이다.    

 

 

Walter Scott.png

    

            

       벽에는 개 그림도 하나 걸려 있었는데 이것은 워즈워드를 만나러 에딘버러에서 온 Walter Scott이 선물한 개를 그린 것이라 한다. Walter Scott은 지독한 애견가로 서른 몇 마리의 개를 길렀다하며 에딘버러의 상징물인 그의 기념탑 아래엔 개와 함께 있는 그의 동상이 서 있다. 밖으로 이어낸 아이들의 방은 난방시설도 없고 예전 우리 시골집같이 신문지로 천정과 벽을 도배했는데 The Times지의 1800년 5월 9일자 신문이다. 벽지 살 돈도 없이 궁해서 그랬는지 이것도 소박한 생활의 일환이었는지 모르겠다. 원래 벽을 발랐던 신문지는 모두 해져서 근래에 그때 그날자의 신문을 구해서 새로 발랐다한다.

      비둘기 집 옆에는 1935년에 세워진 기념관이 있다. 1층 입구를 들어가면 앞에 이름이 나온 토마스 드 퀸시( 그는 코울러리지의 매제이기도 했단다)의 큼지막한 초상화가 벽에 걸려 있다. 2층에는 워즈워드가 거닐은 호수지방의 풍경과 사진이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고 코울러리지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초상화도 많다. 시인의 초기 시 원본들이 유리 상자에 보관되어 있으며 곳곳에 그의 시를 유명한 문인이나 배우가 낭송한 것을 들을 수 있는 오디오 시설이 있다. 우리 일행들도 각자 한 자리씩 차지하고 헤드 폰을 들으면서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나는 “수선화”와 “틴턴 사원--“ 들었다. 한 유리 상자에는 두텁고 큰 공책이 있는데 잉크로 써 내려간 펜 글씨가 빼꼭하다. 이것이 누이동생 도로시 Dorothy Wordsworth 의 일기이다. 도로시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오빠와 살면서 시인의 하루 하루 생활, 그의 가족과 그들을 방문한 많은 방문객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기록했다. 이 기록에 의거해서 워즈워드가 손수 꾸몄던 정원이 오늘 날에도 그 시절과 똑 같은 꽃들로 채워져 있다 한다. 워즈워드는 시 ”틴턴사원---“ 후반부에서 ‘ My dear, dear Friend/My dear, dear Sister'라고 누이동생을 기렸다.

      그래스미어에 도착할 때부터 부슬부슬 시작한 비가 이제는 마구 쏟아진다. 워즈워드는 호수지방의 “힘차고 끈질기게” 내리는 비에 구애받지 않고 산야를 걸었으나 우리 여행자들에게는 그도 인정했듯이 “매년 나일 강의 물을 대기 위해 아비시니아 산맥에 내리는 큰 비를 연상시킬 만한 것이었다.” 우리는 엄청 쏟아지는 비 속을 걸어 근처에 있는 성 오스왈드 교회, Church of St. Oswald 에 있는 워즈워드의 무덤을 찾았다. 오래 된 교회 묘지의 한 모퉁이에 서 있는 장식없는 묘비의 이름으로 여기가 워즈워드 집안의 무덤인 줄 알겠다. 서있는 얇은 석판의 묘비에는 그 흔한 묘비명 하나 없이 윌리암 워즈워드 그리고 사망년도 1850이 적혀 있고 그 아래에는 부인 메어리 워즈워드 그리고 사망년도 뿐이다. 죽어서도 소박한 생활에 고상한 사색을 꿈 꾸는 듯 하여 호화로운 묘지를 보는 것 보다 더욱 가슴이 뭉클하다.

      후세에 만들어 땅에 평면으로 누인 기념비에는 시인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시인, 도로시, 부인 메어리 순으로 출생,사망 연월일이 새겨져 있다. 묘지 옆으로는 맑은 개천이 흘러가고 건너편엔 예쁜 찻집과 기념품 가게들이 나란하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 보니 작은 시골 교회라 별 볼거리는 없었지만 마침 교회 바자가 열려 이것 저것 소박한 시골 물품들도 구경하고 경품행사에 참여하기도 했다. 교회 바로 옆의 정말 작은 오두막이 유명한 그래스미어 생강과자(ginger bread)의 원조라는 바람에 작은 봉지 하나를 샀다.

      날씨기 맑았다면 틀림없이 묘지 근처 냇가의 찻집에서 차를 한잔 하면서 묘지와 냇물을 한참 바라 보았을 터인데 쏟아지는 비는 그런 마음의 여유를 날려 버리고 우리를 얼른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내몰았다. 다시 기념관 근처로 돌아온 우리는 기념관 앞에 있는 찻집으로 몸도 녹일 겸 점심을 하러 들어갔다. 뜨거운 수웁과 빵, 커피와 차로 속을 덥힌 우리는 호수지방 관광 역사 이래 최초가 아닐까 하는 짓을 벌였다.

 

      준비해 온 워즈워드의 시( 수선화, 무지개, 외로운 추숫군,  루시 포임Lucy Poems 중 하나인 그녀는 인적없는 산골에 살았다 와 영생불멸의 송가의 일부) 와 번즈 Robert Burns 의 “My Luve is---", 브리지스 Robert Bridges 의 ”When June is come" 을 읽고 해석하는 소위 공부란 걸 한 것이다. 관광지의 찻집에서 60세 전후의 동양 남녀 여섯이 둘러 앉아  하고 있는게 무엇인지 알았다면 아마 틀림없이 그날 저녁 BBC방송에 나왔을 게다. 미즈 윤이 공부하다 말고 캠코더로 우리들을 찍긴 했는데 너무 깔끔히 편집을 하는 과정에서 이 장면들이 모두 잘려 나간게 천추의 한이다. 이때 미즈 윤이 미국서부터 준비해 온 “무지개” 번역의 “ 전라도 사투리 버전 ”이 있어서 우리를 웃겼는데 자료가 없어져서 여기 싣지 못함이 아쉽다.

      그래스미어를 떠난 우리는 간헐적으로 오는 빗 줄기를 맞으며 북동 방향의 얼스워터 호수Ullswater 로 향하였다. 높은 고원지대의 골짜기를  지나는 길인데 양편으로는 나무가 없는 높은 산이 연이어 있어서 산의 골짜기 마다 오늘 온 비로 물길이 폭포 같은 격류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가 지나는 길도 거의 외길 급으로 좁아 마주 오는 차가 있으면 섰다가 가야 할 형편이었고 여기서도 돌담이 길 가까이 까지 내려와 있고 무수한 디지탈리스 꽃이 피어있었다. 이 높은 고원의 산길을 비를 흠뻑 맞아가며 걷는 배낭을 멘 젊은이들도 몇 보였다. 얼스워터에 도달하자 길도 좀 넓어지고 오른 쪽으로 호수를 바라보며 호수의 서쪽 호반도로를 따라갔다.  

      워즈워드는 자연속의 어떤 장면들은 우리와 함께 평생 지속되며 그 장면이 우리의 의식을 찾아 올 때 마다 현재의 어려움에 반대되는 그 모습에서 우리는 행복감을 맛보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연속의 이러한 경험을 “시간의 점”이라고 불렀다. 1802년 4월 15일 아침 11시(도로시의 일기 덕분에 우리는 이렇게 정확한 시간을 안다), 워즈워드는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얼스워터의 서쪽 기슭 어딘가에 있는  고우버로우 파크란 자연 공원에 핀 야생 수선화를 보았다. 그는 약 만 송이의 수선화가 “미풍에 춤을 추고 있다” 고 썼다. 꽃 들 옆의 호수의 물결도 춤을 추는 것 같았지만 수선화가 “환희“라는 면에서 ”반짝거리는 물결을 능가했다.” 그는 자신에게 시간의 점이 될 한 순간에 대하여 “그 광경이 나에게 얼마나 큰 부를 안겨 주었는지 몰랐다”고 썼다. 그러나;

For oft, when on my couch I lie
In vacant or in pensive mood,
They flash upon that inward eye
Which is the bliss of solitude;
And then my heart with pleasure fills,
And dances with the daffodils.


내가  가끔 긴 의자에 누워
멍하니 아니면 사색에 잠겨 있을때
그 수선화들은 내 심안에 번쩍 나타나니
그것은 고독의 축복
그러면 내 마음은 즐거움으로 가득차서
수선화와 함께 춤을 춘다.

      얼스워터 호숫가의 한 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휴식을 취한 우리는 온 길을 되짚어 귀로에 올랐다. 비는 좀  성글어 졌고 땅거미가 밀려오는 늦은 저녁 빛으로 차창을 스처 지나가는 워즈워드가 거닐었던 산과 들과 호숫가와 그가 사랑했던 나무와 바위와 양떼와 꽃 들을 바라보며 나는 입 속으로 “영생불멸의 송가 Immortality Ode”의 몇 줄을 읊조렸다.  나탈리 우드와 워렌 비티가 주연한 영화 “초원의 빛 Splendor in the Grass” 의 주제로 쓰여 많이 알려진 귀절이다.

Though nothing can bringback the hour
Of splendor in the grass, of glory in the flower;
We will grieve not, rather find
Strength in what remains behind;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다시 돌이킬 수 없다 하여도 슬퍼하지 않으리;
차라리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찾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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