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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ys,” 교수님이 칠판에 글을 적어 나갔다. ‘아 또 저 말이구나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대학 첫 수업을 듣는 새내기의 눈을 뒤로 하고 교수님은 글을 이었다. "Boys, do not be ambitious !" 교실이 술렁였다. “너희는 많은 각오를 하면서 대학에 들어왔을 꺼다. 하지만 너무 큰 야망을 가지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주저앉기 쉽다. 눈앞의 작은 일부터 차근차근 이루어 나가라. 그러다보면 무엇인가 되어 있을 꺼다.” 이창국 교수님의 첫 인사였다.

      작은 키, 잘 빗어 넘긴 하얀 머리, 그리고 깨끗한 회색 양복의 노신사. 두 해전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그 때 교수님은 우리 과에서 영문학을 지도하고 계셨다. 그리고 그 해는 교수님의 정년 마지막 해이기도 했다. 몇 몇 선배들은 그 교수님의 수업대신 다른 수업을 들으라고 했다. 교수님 수업이 유별나서 적응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교수님이 퇴임하시면 새 교수님에게 그 수업을 들으란 친절한 조언도 곁들어졌다. 하지만 교수님의 첫 수업을 들은 나는 성적에 대한 걱정보다는 재미있는 수업이 되리란 기대가 더 컸다.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하면 그 때 교수님의 수업을 듣기로 결정한 일이 현명했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 첫 주가 지나고 본격적으로 수업이 진행되면서 선배들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람들은 이 수업을 ‘별들의 전쟁’으로 불렀는데 그 이유는 교수님의 독특한 수업 방식에 있었다. 수업은 한 작품을 문단별로 꼼꼼히 읽어 가면서 작품의 가치에 대해 알아보는 방식이었다. 교수님이 한 문단을 먼저 읽으시고 교실을 둘러보면 학생들이 저마다 자신이 그 문단에서 하고 싶은 말을 발표한다. 발표가 끝나면 교수님이 발표 내용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하시고 잘했다고 생각하면 출석부 옆에 별 표시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학기말에 별의 개수에 따라 성적을 매겼다. 교수님의 방식은 이러니 저마다 손을 들 수밖에. 내 발표는 교수님이 보기에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자꾸 퇴짜를 맞았다. 아무리 발표를 하여도 별을 딸 수 없으니 답답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발표를 해야 하는지 알게 됐고, 다른 사람들의 기발한 발표를 보며 놀라기도 했다.

      언젠가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Come in’이라는 시를 배운 적이 있었다. 그 때 교수님께서 낭랑하게 “컴 인”이렇게 읽고 지나가자 한 학생의 손이 번쩍 올라왔다. “교수님. 저는 이 제목을 그렇게 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그럼 어떻게 읽어야 제대로 읽는 건지 말해봐” “예. 이 시는 숲이 사람을 들어오라고 유혹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속삭이듯 컴~ 인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요염하게 Come In 읽는 학생의 말에 교실이 웃음바다가 됐다. 교수님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그래, 니 말이 맞는 것 같다.” 하시며 별을 주셨다. 그런 교수님이기에 나도 그 후 인기 드라마와 단편 소설을 비교하기도 하며 열성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성적도 자연히 잘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워즈워드와 블레이크 등의 문인을 더 좋아하게 됐다는 점이다. 교수님의 강의를 통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발표를 통해서, 또 내 공부를 통해서 그들의 작품을 다양하게 볼 수 있었고, 그 아름다움을 깊숙이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교수님과 보낸 1년은 훌쩍 지났다. 그리고 교수님의 스물다섯 해의 교수 생활을 마무리하는 날이 다가왔다. 우리 과에서는 ‘동문과의 밤’이라는 행사 날 이창국 교수님을 위한 퇴임식도 함께 준비했다. 재학생들이 행사를 기획하고 교수님을 모셨다. 지금은 선생님이 되신 교수님의 제자들은 학교로 모였다. 선생님의 선생님을 찾아뵙게 위해서다. 양 손에는 꽃다발과 선물이 가득했다. 하나 가득 모인 제자들을 앞에 두고 교수님은 퇴임사를 낭독하셨다. 동료 교수를 존경한다고 하셨다. 제자들을 사랑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 많은 추억을 잊지 못 하리라 하셨고, 떠날 때 미련두지 않고 떠나는 게 아름다운 것이라 하셨다. 우리는 열렬한 박수로 교수님을 보내드렸다.  

      가끔 생각한다. 내가 교수님의 나이가 됐을 때 나는 그 분처럼 열성을 가지고 학생을 지도할 수 있을 지, 또 학생들이 참여하고 싶은 수업을 해낼 수 있을지 자문해 본다.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나 역시 한 영어 학원에서 고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열 명 남짓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내 마음 같지 않아 힘이 든다. 교과 내용을 한참 가르치다 보면 그 중 서넛은 딴 짓을 하거나 금방 소란스러워 진다. 학생들이 지루해 하는 것 같아 잠깐 농담 몇 마디를 건네면 다시 수업 분위기를 다잡기가 쉽지 않다. 학생에게 무한한 자율권을 주면서도 그들에게 참된 성취의 기쁨을 느끼게 해주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창국 교수님을 그 일을 해내시고 아름답게 물러나셨다.

      요즘 학생들은 선생님을 존경할 줄 모른다는 말도 자주 들린다. 언론에서는 그 이유를 아이들의 인성 교육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학생들은 존경심이 없는 게 아니라 존경할만한 선생님을 찾지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존경하라고 윽박지른다고 그러한 마음이 생기지는 않는다. 난 아직 내가 한 인간으로 존경받을만한 사람인가에 대한 확신이 없다. 그런 내가 가까운 미래에 교단에 섰을 때 선생이라는 이유만으로 학생들에게 무조건적인 존경을 요구할 수는 없다. 학생이 인간적으로 존경할 수 있는 선생님, 식견에 감복하게 하는 선생님, 열의를 다해서 가르쳐주는 선생님, 그리고 학생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선생님. 나는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다. 그리고 제자들의 기억 속에 좋은 선생님이라고 남고 싶다. 이창국 교수님이 내게 보여주신 그 모습을 닮은 선생님으로 교단에 서고 싶다.    

       교수님은 퇴임 후 뵙기 어렵게 됐지만 가끔 교수님 홈페이지에 찾아가고는 한다. 그 곳에서 교수님이 쓰신 수필도 읽고 방명록을 통해 안부를 묻기도 한다. 앞으로도 늘 한결같은 내 선생님으로 남아 주셨으면 좋겠다. 제자의 투정어린 장난도 이렇게 웃음으로 받아 주시면서 말이다.

      “교수님 . 방학인데 건강히 잘 지내고 계세요 ? 학생으로서 처음 맞는 방학이 아닌데도, 방학은 늘 설레고 여유를 가질 수 있어서 좋습니다. 꼭 작년 이 맘 때가 생각납니다. 수강 신청 책자를 뒤적이며, 교수님 강의를 수강할 지를 고민하던 모습. 별을 많이 딸 자신이 없었거든요. 그래도 열심히 해보자고 덤볐고, 그 덕에 많이 얻어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교수님이 개설한 모든 수업을 들었기에, 다음 학기에 교수님 수업을 못 듣는 게 아쉽지만, 제 후배들에게도 멋진 강의 들려주세요. 그럼 몸 건강히 계세요.

p. s. 제목은 기억이 안 나지만, 수업시간에 배웠던 구소련 어떤 시인의 마지막 행의 첫 번째 연 'So be it' ..
저는 아직도 '소비에트' 의 의미를 담았을 꺼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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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국님의 댓글

이창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백건호 군, 반갑네.
백군은 나의 강의는 이제 그만 들어도 되지. 충분히 들었으니까. 발표도 많이 했고.
"백군은 이제 하산하도록 하라!" "So be it"가 "Soviet"라? 생각은 자유라지만 나는 지금도 별을 줄 생각은 없네.

안녕. 또 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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