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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아무도 호각을 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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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국 작성일 06-07-05 01:44 조회 117,57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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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문

        첫 수필집 『다시 한번 강가에 서다』에 지면 관계로 수록되지 못한 상당수의 글과 그간 새로 쓴 몇 편의 글을 모아 이처럼 두 번째 수필집을 내게 되었다.
어느덧 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집은 따로 지어 떨어져 살게 되었으나 근본은 같은 한식구들이다.

        먼젓번 책에 끼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 차가운 양철 캐비닛 서랍속에 원고 형태로 처박혀 있는 이들을 보고 만질 때마다 안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가 없거나 돌보지 않는 고아들처럼 느껴졌다. 집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신세처럼도 생각되었다. 운이 좋아 예쁜 집에 한 식구로 옹기종기 모여 살면서 세상 구경도 하고 사람들의 사랑도 받는 첫 수필집의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울까 하는 측은한 생각되 들었다. 집 없는 이들에게 따뜻한 보금자리를 하나 마련해 주어야겠다는 일념에서 서둘러 이 수필집을 내게 되었다.

        나의 이 두 번째 수필집 『그때는 아무도 호각을 불지 않았다』에는 36편의 글이 실리게 되었으니 그 분량만으로는 첫 번째 수필집과 같다. 같은 사람의 글이니 그 성격도 별다름이 없겠지만 구태여 한 가지 특징을 지적한다면 여기에는 약간 길고, 감성보다는 이성에 호소하는 논리적인 글들이 비교적 여러 개 들어 있다는 것이다. 수필집 제목으로 사용된 작품을 비롯하여 “늙기의 어려움” “정년퇴직” “강물은 더러워졌지만” 등과 같은 글들은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손바닥만한 크기의 수필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길다. 설득이 생명인 산문에서는 어느 정도의 길이가 없이는 목적을 달성 할 수 없다. 너무 긴 수필도 문제이긴 하겠지만 천편일률적으로 원고지 몇 장 분량으로 제한되다시피 되어버린 우리의 현실도 좋은 수필의 생산을 위하여서는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나의 수필이 길어진 것은 다리가 긴 사람이 긴 바지를 입어야만 하는 것과 같은 이치에서이다. 글의 주제는 글의 길이를 결정한다.

        나의 첫 수필집은 요사이 흔히 말하는 “베스트셀러”는 되지 못하였지만 저자인 나에게는 더 바랄 수 없는 큰 성공이었다. 비록 소수였지만 이 세상 어느 곳에는 나의 글을 아주 좋아하고, 사랑하고, 높게 평가해주는 그런 독자들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나는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고 이에 대하여 무한한 기쁨과 자부심을 느꼈다. 나의 이 두 번째 수필집도 세상에 나가 새로운 독자들을 더 많이 불러모으면 오죽이나 좋겠으랴마는, 그렇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첫 수필집을 통하여 나의 글을 알게 된 독자들의 손에 꼭 들어가 그들에게 또 다른 새로운 기쁨을 주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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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아무도 호각을 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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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 날도 오후 4시쯤 해서 나의 아파트를 나와 걸어서 약 30분 거리에 위치한  과천에 있는 서울대공원으로 향하여 걷기 시작하였다. 별 일이 없으면       거르지 않고 매주 한 번 하는 운동 겸 산보를 하기 위함이었다. 섣달 그믐날이었기 때문에 공원에는 사람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 크고 넓은 주차장       은  텅 비어 있었으며, 그 속에 있는 몇 대의 차들은 주인들이 주차 해놓은 채로 고향에 내려가 버린 듯했고, 가뜩이나 썰렁한 분위기를 한층 더 썰렁하게 만     들고 있었다. 날씨는 대단히 추워 털 잠바에 털모자, 그리고 두툼한 가죽장갑으로 몸을 감싸고 20분 이상이나 빠른 걸음으로 걸었으나 평소처럼 땀이 난다     거나 몸 전체로 덥다는 느낌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공원 정문 근처에 도착하였을 때는 항상 그랬듯이 기분이 상쾌하고 좋았다. 찾는 사람들이 없어서인지 공원 정문과 매표소는 일찌감치 문을 닫은 듯 하였다. 하기야 섣달 그믐날 이 늦은 시간에 이런 곳을 찾아올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평소에 하던 대로 공원 정문을 지나 사람들이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도록 허용된 공원의 외곽(外廓)을 한바퀴 돌기로 마음먹고 부지런히 걷기 시작하여 어느새 대공원의 넓고 큰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둑 위를 걷기 시작하였다. 호수는 그간 며칠동안 계속된 강추위로 꽁꽁 얼어붙어 있었고, 그 위에는 사람의 발자국 하나 나지 않은 하얀 눈이 곱게 덮여 있었다. 그것은 마치 아무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원시림과도 같이 나에게는 하나의 유혹이며 도전이었다. 나는 별안간 그 눈을 밟으며 얼음 위를 걷고 싶은 강력한 충동에 사로 잡혔다.

        그러나 그것은 금지된 일이었다. 호수 근처 여기 저기에는 호수에 접근조차 하지 말라는 경고의 말이 적힌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호수는 사람이 빠지면 죽기에 충분할 만큼 깊어 보였다. 둑 위를 걷는 일 조차도 사실은 규칙위반이었다. 나는 지난여름 이미 두 번이나 이곳을 걷다가 공원 경비원에게 제지를 당한 적이 있었다. 내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둑 위를 걸었던 것은 그 위에 잘 자란 풀을 밟기가 좋아서였다. 기계로 잘 깎아놓은 풀이 운동화 밑에서 밟히는 그 촉감과 소리를 나는 특별히 좋아하였다. 그런데 오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둑 위를 걷는 데 만족하지 않고 어느덧 둑 밑으로 내려와 호숫가에 서서는 한 다리로 얼음이 어느 정도 두껍고 단단한가를 확인해 보고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놀랐다.

        그리고는 곧바로 얼음 위로 올라섰다. 이어서 조심스럽게 호수 가장자리를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놓기 시작하였다. 몇 걸음 옮겨놓은 후 나는 얼음이 나의 몸무게를 지탱하여 줄만큼 충분히 두껍고 단단하게 얼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는 좀더 마음놓고 얼음 위를 뚜벅뚜벅 걷기 시작하였다. 순간 나에게는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지냈지만 나의 몸 속 어느 구석에 깊숙이 어린 시절의 체험으로 숨겨져 있었던 그 스릴 넘치는 즐거움이 참으로 오랜만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 흥분과 스릴은 얼음 밑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 때문에 더한층 증가되고 보강되었다. 얼음은 언제고 깨어질 수 있었고 그렇게 되면 나는 영락없이 차가운 물 속에 빠져버릴 수밖에 없었다.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두려움보다는 어느 때 보다도 더 강력한 모험심으로 가득 차 있었음을 느꼈으며, 참으로 오랜만에 그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생명력을 느껴 볼 수 있었다.

        주위에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가끔 일어나 눈 위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소리 이외에는 사방은 쥐죽은듯 고요하였다. 그 큰 공원을 나는 혼자서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눈앞에 펼쳐져 있는 아무도 디딘 흔적이 없는 하얀 눈에 홀려서, 그리고 뒤로는 점점 길어지고 있는 나의 발자국에 취하여,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원 경비원들이 불어 대는 그 호각 소리가 들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되어 나는 나도 모르게 좀더 대담해졌다. 더 크고 위험한 사냥감을 찾아서 더 험하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는 사냥꾼과도 같이 나는 이제 호수 가장자리를 따라 살금살금 걷는 모험에서 진행의 방향을 호수 한가운데로 돌렸다. 역사상 극지탐험가로 유명한 노르웨이의 아문젠이나 영국의 스콧트라도 된 기분으로 나는 아예 호수를 가로질러 건너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부지런히 얼마를 걸었을 때 나는 먼 곳으로부터 들려 오는 어떤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애써 못들은 체하였으나 곧 그 소리는 이 공원에서 누군가가 좀 위험하거나 수상한 짓을 하였을 때 언제 어디서고 공원 경비원들이 불어 대는 그 귀에 익은 호각소리라는 사실을 나는 싫었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날 이 시각에도 공원경비원이 있다니. 날씨도 흐린데다가 겨울의 짧은 해도 어느덧 넘어간 어둑어둑한 시각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 소리가 어느 방향에서 들려 오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것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나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당황하지 안을 수 없었다. 나는 우선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이미 너무 멀리 호수 가운데로 나와 있음을 알았다. 앞에 남아 있는 거리가 이미 지나온 거리보다는 짧아 보였다. 이제 와서 되돌아가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각소리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 나를 향하여 계속해서 더 크게 신경질적으로 울려왔다. 나는 다급해졌다. 나는 막연하나마 호각소리가 나는 방향과는 반대방향으로 이제는 걷는 것이 아니고 아예 전속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 어리석고 무모한 얼음 위에서의 도주(逃走)를 하는 동안 나는 아무 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였다.

        마침내 나의 두 다리가 육지를 다시 디뎠을 때 나는 한 손에 무선호출기를 들고 목에는 반짝거리는 호각을 늘어뜨린 제복을 입은 공원근무자의 의하여 사태에 알맞은 영접을 받았다. 그는 잔뜩 성이나 있었다. 그의 얼굴과 목은 분기(憤氣)와 추위로 온통 주홍빛으로 변하여 있었다. 당장이라도 나를 쳐죽이기라도 할 그런 표정이요 태도였다. 그러나 정작 그의 분노의 대상인 이 무법자가 귀밑머리가 허옇게 센 중년이 훨씬 넘은 남자라는 사실에 이 공원 경비원은 약간 놀라면서 당황해 하고 동시에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는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쏟아 놓을 알맞은 말을 순간 잃어버리고 잠시 나를 노려보기만 하였다. 그후 나는 약 30분 동안에 걸쳐 나의 아들 뻘쯤 되어 보이는 젊은이로부터 쏟아지는 질문과 질책, 그리고 강의와 설교의 집중포화를 한마디 변명이나 대꾸 할 사이도 없이 받아야만 하였다. 약간 정도가 지나친 고약하고 짓긏은 장난을 하다가 발각되어 무서운 담임 선생님 앞에 서게 된 어린 학생처럼 나는 그저 잘못했노라고 거듭거듭 사과하였다. 손이 발이 되게 싹싹 빌면서 다시는 이런 장난을 하지 않겠노라고 약속하고 맹세까지 하고 나서 나는 간신히 심문()에서 풀려났다. 그는 내가 자살을 하려는 사람으로 생각했다는 말도 하였다.

        풀이 죽어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오면서 나는 무언지 괜히 억울하고 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충동적인 행동을 눈곱만치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아예 이해하려 들지도 않은 그 젊은이가 괘씸하기도 했고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창피하여 죽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내가 얼음판 위에서 벌인 그 행동을 그 젊은이에게 당당하게 변호하거나 변명하지도 못하고 무슨 죽을죄라도 지은 듯이 무조건 잘못했노라고 싹싹 빌기만 하였던 나의 행동에 스스로 짜증이 났다. 그러나 그렇게 설명해 보았어야 결과는 뻔한 일이었다. 그날 나를 체포한 그 젊은이의 마음은 이미 그 호수의 얼음처럼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었고, 그는 오직 공원 근무자로서의 의무와 책임감으로 충만하여 있었기 때문에 다른 설명이 헤집고 들어갈 여지는 없었다. 차라리 아무 항변()도 아니했으니 망정이지 뭐라고 변명을 시도하기라도 했다면 그 젊은이의 얼굴은 더 빨개졌을 것이며 그의 혈압은 더 상승하였을 것이며, 그리고 아마도 나의 정신상태가 지극히 위험한 수준에까지 도달하였다는 확신만 갖게 만들었을 것이다. 만약 불행하게도 호수의 얼음이 깨어져 내가 만약 물에 빠져 죽기라도 했다면 나의 죽음은 단순히 나와 나의 가족의 불행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열심히 일하는 선량한 젊은이는 어김없이 직장 상사(上司)로부터 엄중한 책임추궁을 받을 것이며, 재수가 없으면 귀중한 직책과 직장도 날아갈 수도 있다. 나의 가족들조차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공원당국이 어떻게 시설물을 관리하였기에 사람이 빠져 죽게 만들었냐고 아우성을 칠 것이며, 변호사를 사서 엄청난 액수의 손해배상도 받아내려 들것이다. 젊은이가 그 정도로 나에게 화를 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나의 가슴속에 생겨난 그 분하고 억울한 마음은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다. 내가 한참 그 재미있고 스릴에 넘치는 놀이를 신나게 벌이고 있는 터에 난데없이 들려 온 그 호각 소리가 나에게는 한없이 원망스러웠으며, 원하지도 않는데 구태여 나의 안전에 대하여 책임지고 나의 목숨까지 보호해 주겠다고 나서는 그 낯 도깨비 같은 젊은이의 어른스런 태도와 언행이 본능적으로 싫었으며, 무엇보다도 이제는 어디를 가더라도 찾아볼 수 없는 옛날의 그 진정한 자유와 재미가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에 한없이 서운함을 느꼈다. 이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새장에  가쳐있는 새가 되어 있었다. 새장 속의 새와도 같이 안전하기는 하다마는 자유롭지 못하다. 공중을 나는 새처럼 언제 어느 때고, 어느 곳이고, 날아가고 싶을 때 날아가고, 내려앉고 싶을 때 원하는 곳에 내려앉을 수 있었던 그런 때가 한없이 그리워졌다. 어린 시절 나와 함께 놀았던  고향 동무 가운데 하나는 어느 여름 강에서 놀다가 빠져 죽었고, 나 자신도 그해 겨울 바로 그 강의 언 얼음 위에서 썰매를 타다가 얼음이 깨어져 천만다행으로 죽지는 않았지만 그 차고 무서운 물 속에 목까지 빠져 죽을 뻔한 적이 두 번이나 있었다. 그래도 나는 강에 나가지 않고는 못살았다. 그 속에 숨어 도사리고 있었던 어떤 종류의 위험도 내가 강에서 얻어 누릴 수 있었던 그 즐거움과 스릴을 빼앗아 가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때는 아무도 우리에게 호각을 불지 않았다. 나를 마치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취급한 그 경비원이 옳았다. 그 추운 날 오후 늦게 혼자서 꽁꽁 얼어붙은 호수의 얼음 위에 발을 올려놓는 순간 나는 다시 어린 소년이 되어 있었다.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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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 굴

        텔레비전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여러 가지 즐거움 가운데서 꼭 집어서 하나를 말한다면 그것은 보다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쉽게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안방에 앉아서 우리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얼굴은 물론 인종이 다른 세계각국 사람들의 얼굴도 볼 수 있다. 옛날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텔레비전은 청와대에 있는 우리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바다 건너 백악관에 있는 미국 대통령조차도 마치 이웃에 사는 아저씨처럼 자주 볼 수 있게 만들어 버렸다. 대통령의 얼굴은 물론, 장관들, 국회의원을 비롯한 사회 각층의 유명인사들, 그리고 스포츠나 연예계에 스타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범죄자나 살인자들의 얼굴까지도 우리는 매일같이 보면서 살게 되었다. 모두가 텔레비전 덕분이다. 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얼굴 모양과 표정의 변화를 통하여 그 사람의 인격이나 심성, 그리고 심리상태까지 순간적으로 읽게 되며, 동시에 그들에 대한 평가도 나름대로 내어버린다. 텔레비전이 나오기 전에는 신문이나 잡지가 이런 일을 담당하였지만 그 범위나 효과에 있어서 텔레비전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텔레비전은 물론 신문이나 잡지조차 없었던 아주 옛날부터 사람의 얼굴은 신체의 어느 다른 부분보다 그 사람의 사람됨을 나타내고 확인하고 평가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어 왔다.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성품이나 성격을 읽어 냈으며,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의 장래 운수까지 예언하는 관상술도 생겨났다. 이것은 그 사람의 얼굴이 바로 그 사람이 타고난 운명이란 전제에서 시작된다.

        관상술의 허실을 떠나서 우리는 얼굴이 신체의 어느 다른 부분보다 돋보이는 부분이란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사람이 크게 성공하여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제일먼저 나와 뭇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것도 얼굴이요, 어떤 죄를 저질렀거나 부끄러운 일을 하다가 들켜서 경찰서에 끌려와 심문을 받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 감추려고 애쓰는 부분도 얼굴이다. 세상에 어떻게 해서든지 드러내고 싶어하는 것도 얼굴이요, 어떻게 해서든지 감추려고 안간힘 쓰는 부분도 바로 얼굴이다. 사람이 필사적으로 살려 보려고 애쓰는 것은 목숨만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소위 체면을 지키는 일 또한 목숨만큼이나, 아니, 때로는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사람은 입으로 말하게 되어 있지만 알고 보면 얼굴로 더 많은 말을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다. 아무런 연락 없이 밤늦게 집에 돌아온 딸을 기다리는 아버지는 입으로는 단 한마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지만 영리한 딸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는 단번에 아버지의 심정은 물론 집안 식구들의 분위기까지 읽어 낼 수 있다. 이처럼 노여움뿐만 아니고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은 신체의 다른 부분으로는 불가능하고 오직 얼굴로서 그 표현이 가능하다. 얼굴의 정직함은 그 얼굴의 소유자도 어쩔 수 없다. 얼굴은 거짓말을 못한다. 소위 포커 페이스란 말도 있지만 그런 얼굴을 하는데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명 인간의 천성에 어긋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그런 얼굴을 아무런 고통 없이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심성이 아주 고약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정서적으로 아주 둔하거나 무미건조한 성품의 사람일 것이다. 사람은 행복하면 미소짓고, 재미있는 일을 보면 큰소리로 웃고, 화가 나거나 부끄러우면 얼굴이 붉어지고, 놀라면 창백해지고, 슬프면 우는 사람이 사람인 것이다. 얼굴은 인간성의 지표이다.

        우리가 누구를 처음 만났을 때 우리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도 바로 상대방의 얼굴이다. 그 외에 다른 부분은 다음 차례이다. 그러니 사람은 누구나 상대방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얼굴, 아름다운 얼굴을 갖기를 소망한다. 잘 생긴 얼굴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사실은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축복이요, 인생살이에 있어서 적지 않게 유리한 점이기도 하다. 벽에 걸린 아름다운 풍경화와도 같이 아름다운 얼굴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그냥 바라만 보아도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요사이 젊은이들이, 특히 젊은 여성들이, 적지 않은 돈을 들여가며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얼굴 성형수술을 받는다는 사실은 결코 이상한 일도 비난받을 일도 아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인위적인 또는 인공적인 얼굴의 변경은 얼굴이란 것이 한번 만들어진 대로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수시로 그리고 항상 우리의 노력이나 의사와는 관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 앞에서는 그 의미나 가치가 크게 감소한다. 달의 모습이 그렇듯이 얼굴은 항상 그리고 수시로 변화한다. 외과의사의 칼날 밑에서 낮은 코가 오똑해지고, 작은 눈이 커지고, 없던 쌍꺼풀이 생겨날 수는 있겠으나, 그 칼은 결코 인간의 얼굴이 걸어가야만 하는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변화의 행진을 정지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표면과도 같이 인간의 얼굴은 사랑과 미움의 열기도 참고 견디어 내야만 하고, 슬픔과 죽음의 눈도 맞아야 하며, 성공과 승리의 햇볕도, 실패와 절망의 바람도, 탐욕에 따른 근심과 걱정의 눈도, 분노와 질투의 폭풍우도 쐬고, 맞고, 견디어 내야만 한다. 천재(天才)와는 달리 얼굴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북극성처럼 얼굴은 한 곳에 고정될 수도 없다. 얼굴은 인생이란 대장간에서 끊임없이 다듬어지고, 만들어지고, 형성되는 쇳덩이와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는 과정이요 진행이다. 제아무리 훌륭한 외과의사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일순간의 그리고 부분적인 성공에 불과하다.

        최근에 와서 나는 예전보다 훨씬 더 사람들의 얼굴에 흥미와 관심을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가운데 하나는 그 얼굴이 크건 작건, 둥글건 네모졌건, 못생겼건 잘생겼건, 어느 것 하나 흥미 없는 얼굴은 없다는 사실이다. 눈, 코, 입, 귀, 눈썹, 머리카락 - 이와 같이 불과 여섯 개 정도의 구성물이 둥그런 평면 위에 만들어 내는 얼굴은 지구상에 살고 있는 50억이 넘는다는 사람들 가운데 어느 하나와도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 나는 자못 심각해지지 않을 수 없다. 수학의 순열(順列)과 조합(組合)의 법칙도 통용되기를 거부하는 얼굴의 무한하고 미세한 유사성과 차이점은 신비롭다 못하여 두렵기 기조차 하다. 쌍둥이처럼 똑같다고들 말하지만 이 세상에 꼭 같은 쌍둥이는 없다. 그리고 보라, 사람의 얼굴에서 - 갓 태어난 아기의 얼굴에서조차 - 분출되어 나오는 신비한 에너지와 무한한 가능성을! 사람의 얼굴에서 나는 신성(神性)을 본다.

        한때 나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얼굴에 특별한 매력을 느꼈고, 특별히 잘생긴 남자들의 얼굴을 보고 말없는 감탄이나 부러움을 느낀 때도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어지간히 든 지금에 와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이제 나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좀더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게 되었으며, 오히려 예쁘고 잘생긴 젊은 사람의 얼굴보다는 젊음의 베일에 가려졌던 아름다움이 일단 사라지고 난 그 자리에 들어선 - 마치 세월이 지나면서 오래된 유화(油畵)의 페인트가 떨어져 나간 그 밑에 그 동안 감추어져 보이지 않던 밑그림이 드러나듯 - 그 사람의 힘들고 고통스런, 그러나 꿋꿋하고 당당한 역사가 쓰여지고 새겨진 그런 주름진 얼굴을 더욱더 사랑하게 되었다. 이런 얼굴을 바라보는 일은 마치 그 사람에 관한 한 권의 역사책을 읽는 것만 같고, 완성된 하나의 예술품을 감상하는 일과도 같다.

        텔레비전에 매일같이 수도 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나는 나의 얼굴이 과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따지고 보면 나도 나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하게는 모른다. 내가 알고 있는 거울 속에 나타난 나의 얼굴이나, 사진 속에 나타난 나의 얼굴은, 서로 비슷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때에 따라 그리고 나의 마음 상태에 따라 항상 다르게 나타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이미 나와 오랫동안 함께 가까이 있어서 나를 잘 알고 있는 나의 가족들과 친척들, 그리고 친구들의 망막에는 이미 정확하고도 분명하게 새겨져 있을 것이며, 이처럼 한번 새겨진 나의 영상에 대하여 이제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내가 발견한 또 하나의 놀라운 일은 우리의 얼굴이란 마치 훌륭한 건축물과도 같아서, 짓는데는 그처럼 오랜 시간이 걸리고 노력이 들지만, 어떤 불행이나 불운, 또는 예측하지도 않은 재앙 앞에서는 지진에 견고한 건축물이 힘없이 무너지듯 순식간에 형편없이 결단나고 만다는 사실이다. 어제까지 정부의 고위관리였던 사람이 오늘 아침 수갑을 차고 감옥으로 끌려가면서 보여주는 초라하고 초췌한 얼굴은 바로 어제의 그 당당하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던 그 잘생긴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만들어진 나의 얼굴을 더 보기 흉한 모습으로 망가뜨리는 그런 불행이나 재앙이 앞으로 일어나 주지 않기만 간절하게 바랄 뿐이다.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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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배에 대하여

        이제는 어디를 가도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이 땅에서 그처럼 오랫동안 자랑스럽게 그리고 굳건히 지켜 온 그들의 터전을 잃어 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버스, 기차, 그리고 사람들이 모이는 공공장소, 어디에나 금연 또는 흡연금지 표시가 붙어 있고, 이 경고는 이제는 단순히 공중도덕 차원의 권고나 충고 정도의 그런 부드러운 문구가 아니다. 나는 며칠 전 서울역 대합실에서 나이 지긋이 들어 보이는 신사와 젊은 경찰관이 성난 목소리로 옥신각신하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흡연금지구역 내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적발된 신사는 그에게 벌금을 물리려고 하는 경찰관과 승강이를 하고 있었다. 신사는 한사코 경찰관의 제재행위에 대하여 강하게 항변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을 가운데 두고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둥글게 원을 그리었고 제각기 자신들의 처지와 의견을 가지고 사태의 진행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나는 비록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아니지만 웬일인지 담배를 피우다가 붙잡혀 곤욕을 치르는 중년신사에 대하여 별다른 이유 없이 동정심을 느꼈다. 경찰관이 꼭 벌금을 물릴 것이 아니라 그만큼 하고는 슬며시 못이기는 체하고 그 신사를 그냥 보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닌게 아니라 이 땅에서, 아니 이 지구상에서, 애연가(愛煙家)들이 처한 처지가 이제는 말씀이 아니다. 불쌍해 죽을 지경이다. 이제는 예전처럼 언제 어디서나 두 콧구멍을 통하여 자유롭고 위엄 있게 둥글둥글한 도넛스 모양의 하얀 연기를 기세 좋게 뿜어낼 수 없게 되었다. 담배를 꺼내서 불을 붙이기 전에는 먼저 주위를 한번 훑어보아야만 된다. 어제까지도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그 누구의 아무런 눈치볼 필요없이 당연히 즐기던 그 습관과 즐거움에 대하여 이제는 남의 눈치를 보게 되었으니 그들로서는 참으로 울화통이 터질 일일 것이다. 지금까지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면서 누려 온 그 우월감과 특권은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걱정과 의혹, 경멸과 증오의 시선이 들어섰다. 항상 언제 붙잡혀 강제출국 당할는지 모른다는 걱정과 경계심 속에 살아야만 하는 밀입국자나 불법체류자들처럼 주위에서 애연가의 숫자는 어느새 합법적 다수에서 불법적 소수로 반전되었으며, 동시에 그들은 현저하게 법적 사회적 압력과 핍박, 그리고 차별대우에 시달리게 되었다.

        나는 도대체 어째서 흡연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이처럼 갑작스레 변하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담배가 결코 우리의 몸에 좋은 것은 아니란 것은 잘 알면서도 지금까지 우리는 담배를 피워 왔으며, 사회적으로도 용납되어 왔다. 담배 장사는 하도 잘 되니까 아직도 나라가 도맡아 하고 있으며, 국가의 재정에도 한몫 단단히 하는 효자로 되어 있다. 집에서는 부모님들로부터, 학교에 가서는 선생님들로부터, 우리는 담배를 피우지 말라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재미있는 사실은 담배를 피우지 못하도록 우리들을 엄격하게 단속한 우리의 아버지들이나 선생님들은 거의 예외 없이 지독한 골초였다. 나처럼 소심하고 겁이 많은 아이들은 이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고 따랐지만, 보다 남자답고 깡이 좋은 친구들은 일찌감치 이 금기(禁忌)를 깨어 버리고는 은밀하게 그것에 맛을 들였다. 그런데 이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는 금연율(禁煙律)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유효하였고 신기하게도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부터는 그 효력이 상실되었다.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는 순간부터는 담배를 입에 꼬나 물어도 어제까지 큰 문제가 되어 학교에서는 정학이나 심지어는 퇴학까지 당해야만 했던 범죄행위가 신기하게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결국 담배는 어른들에게는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 전세계적으로 공인된 한 습관 또는 관습으로서 자리를 잡고 지금까지 내려왔다.

        그런데 이제는 그게 아니다. 담배는 아주 지독하게 해로운 물건이 되어 버렸다. 우리의 생명과 관계되는 일이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담배연기는 더 이상 귀찮거나 괴로움을 주는 연기만이 아니다. 담배연기는 이제 사람을 죽이는 살인연기()다. 신문이나 텔레비전 보도에 의하면 담배는 폐암을 유발하며, 더 끔찍한 사실은 그 연기를 폐 속으로 깊이 드려 마셨다가 콧구멍으로 뿜어내는 재미를 즐기는 흡연가 뿐만 아니라, 담배는 입에도 대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담배연기만 맡으면 재채기를 하고 콧물 눈물을 줄줄 흘리는 옆에 있는 사람까지도 폐암에 걸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최근에 발표된 과학적인 연구, 발견, 지식, 이론은 우리를 겁주어 위축시키기에 충분하며, 특히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들로서는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생산해 내는 사람들이란 이제 단순히 귀찮은 존재가 아니라, 마치 지옥에서 나와 지상에 문둥병이나 전염병을 퍼트리는 악마들이나 다름없는 존재로서, 가능하면 접촉을 피하여야 만할 뿐만 아니라 이 지구상에서 단숨에 퇴치하여야만 될 흉물들이다.

        그런데 나 개인으로서 궁금한 일은 어째서 이 두렵고 저주받아 마땅할 담배라는 것이 그렇게 오랜 세월 우리와 함께 살아왔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널리 보급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애용하여 왔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담배 속에는 분명 니코친이라는 중독성 성분 이외에 과학적으로 분리해 낼 수 없는 어떤 다른 성분도 포함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인류역사상 최초로 우연히도 이 마른 풀잎을 입이라는 아궁이에 태워서 그 연기를 두개의 콧구멍이란 굴뚝을 통하여 내보내는 신기한 행동을 시작한 사람은 분명 그 괴상하고 유별난 행위 속에서 무엇인가 자신에게 대단히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음도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담배를 태움으로써 우리의 마음에 또는 몸에 어떤 불편함을 치료해 주는 어떤 약효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냄으로써 담배를 계속 피우게 되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권하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그렇게 오래도록 우리들의 친구로서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분명 담배에는 약효가 있다. 담배는 생겨난 이래 인류에게 끼친 공로도 적지 않다. 사람이 화가 났거나 흥분했을 때 그것을 진정시켜 주는 것도 담배요, 우리가 슬플 때나 고통에 또는 근심걱정에 쌓였을 때 우리를 위로해 주는 것도 담배다. 담배는 지루함이나 두려움도 때로는 추방해 준다. 가슴 깊은 곳을 한바퀴 돌아 나와 목구멍을 통하여 공중에 흩어지는 하얀 연기 속에서 우리는 그 가슴속에 들어 있는 고통과 고뇌의 분산(分散)을 보고 느낀다. 시인이 알맞은 말이 떠오르지 않아 고심할 때 무엇을 하는가? 그는 담배를 한대 태우면서 뮤즈의 은총이 내리기를 기다린다. 절박한 재정적 문제에 직면하여 파산일보직전에 처한 사업가 또한 한숨과 함께 담배에 불을 붙여 절망에 빠진 자신의 심기를 달랜다. 물론 애꿎은 담배만 빨아 댄다고 해서 돈 문제가 해결될 리는 없겠지만 그러나 그 한 개피의 담배가 다 타는 동안 다급한 나머지 조금 전까지 머리 속에 그렸던 그 끔찍한 생각을 바꿀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도 있다. 어떤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있어서 담배는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에게 담배는 고통스런 삶을 견디어 나가게 만들고, 가능하게 만들고, 그나마 의미를 갖게 만드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다.

        흡연 유해론자 또는 흡연 백해무익론자들의 주장에 따라 담배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경우를 가상해 본다. 담배 피우는 사람은 어디를 가도 하나도 없다. 그러니 어디에 가도 그 매캐하고 불쾌한 냄새는 맡고 싶어도 맡을 수 없는 살맛 나는 세상이다. 담배꽁초도 없으니 재떨이도 있을 리 없다. 자, 그렇다고 담배라는 해악이 없어진 세상에 바로 지상낙원, 아니 지상천국이라도 다시 생겨날 것인가? 이제 그 공기를 더럽히는 요소가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모두 청정한 공기만을 폐에 집어넣게 되어 백년이상의 장수를 누리게 될 것인가? 그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국이 도래하기 전에 이 나라의 병원이란 병원은 갑자기 수많은 새로운 환자들로 가득 찰지도 모를 일이다.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골치가 아프고, 소화가 잘 되지 않으며, 불안하고 초조하며, 현기증이 난다고 의사에게 호소하는데 의사도 그 원인과 치료방법이 그가 의과대학에 다닐 때 공부한 교과서에는 없는 증상이기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원인을 알아낼 수 없는 의사는 고민하던 나머지 오래 전에 끊었던 담배를 찾아 한대 꼬나물런지도 모른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요소가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에서도 담배를 피울 줄 안다는 사실 또한 그 가운데 하나이다. "호랑이가 담배 먹던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는 옛날 이야기는 정말로 담배를 피울 줄 아는 호랑이가 있었다기보다는 길고 긴 인간역사에 있어서 인간과 담배사이의 길고 긴 인연을 말하여 주는 말이다. 누군가 어떤 식물의 잎을 말려서 불을 붙여 입에 대어 본 이래로 이 흡연행위는 인간만의 습관으로, 관습으로, 의식(儀式)으로, 상징으로, 그리고 하나의 문화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다정한 친구로, 특히 어려울 때의 친구로, 지금까지 지내 왔다. 많은 비흡연가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흡연이 나쁜 일이라면, 그것은 이세상의 다른 종류의 모든 악과도 같이 법으로 단숨에 근절시키려고 시도할 것이 아니라 좀더 시간을 두고 교육을 통하여 서서히 추진할 일이다. 악이란 이 세상에 한번 태어나면 여간해서는 쉽게 죽어 없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따져 보면 흡연은 이세상의 악 가운데는 비교적 그 정도가 약한, 눈감아줄 만한, 그리고 필요한 악이다. 나는 오히려 담배 피우는 자유가 급격히 제한되거나 말살되었을 때 과연 사람들이 그 동안 담배에 의존하던 심리적 제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하여 오히려 더 강력하고 폭력적인 수단에 의지하거나 호소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담배가 이처럼 20세기말에 와서 급작스럽게 우리 이간들에게 해로운 물건으로 낙인찍히게 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과학의 발달로 담배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우리의 몸에 해로운가를 밝혀 낸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겠으며, 동시에 이런 해로운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확인하고, 느끼도록 만들어 준 컬러 텔레비전의 보급 또한 크게 한 몫을 했다고 하겠다. 아울러 도시문화의 발달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파트나 사무실의 밀폐()된 공간에서 서로 부대끼면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 또한 담배연기의 존재를 실감하게 만드는 하나의 커다란 이유일 것이다. 불과 수 십 년 전 대청마루나 사랑방에 앉아 담배를 피우시던 할아버지의 장죽()에서 나온 연기는 한옥 특유의 엉성한 방풍설비, 아니 완벽한 통풍시설, 덕분에 다른 사람들의 코에 도달하기 전에 수많은 틈새를 통하여 밖으로 빠져나갔을 것이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나 개인적으로는 이 세상의 담배가 모두 사라진다는 사실은 참으로 서운한 일이다. 술이 없는 세상과도 같이 재미없고 무미건조한 세상이다. 나쁘다면 술이 오히려 담배보다 더 나쁘지 않을까? 담배의 소멸과 더불어 그 독특한 냄새도, 그 연기도 사라지고, 동시에 거의 예술적 수준에 도달한 각종 디자인의 수많은 종류의 그 예쁘고 귀여운 담뱃갑도, 파이프도, 라이터도, 모두 사라지고 난 자리는 과연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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