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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국 저서소개

문학비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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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국
댓글 0건 조회 108,737회 작성일 06-08-27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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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記事 및 論評         

 
☞ 문학비평서가 홍수를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출판이 눈에 띄는 이유는 기존의 비평서들과는 전혀 다른 신선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뉴스피플, 1944. 2. 10.) 

☞ 그의 이야기는 남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남의 생각을 모방하지 않는다. 그의 사고의 독창성과 평가의 대담성은 우리 시대의 이름 있는 작가, 비평가, 학자들을 가차없이 재단하고 있다.   - 정정호 중앙대 영문과 교수 (중대신문, 1993.11. 8.) 

☞ 문학비평가의 자질론에서 시작, 칭찬 일변도의 비평풍토를 비판하고, 서구문학 이론의 무분별한 도입에서 오는 문제점을 점검하는 등 다양한 시각으로새로운 비평세계를 선보이고 있다. 비평언어의 산문화라는 측면에서도 신선한 느낌을 준다.  (세계일보, 1933. 12. 25.) 

☞ 이 책은 문학논의가 갈수록 어려워져만 가는 현실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한겨레신문, 1933. 12. 22.) 
  

☞ 전체적으로 이 책은 문학을 중심으로 한국의 지성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을  들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문학비평이라는 특정 글쓰기에 머무르지 않고, 문학이라는 인간 정신활동 전반에 대한 원숙한 비평의 세계를 과시한다.   (조선일보, 1993. 12. 25.) 

 ☞ 저자는 이 책에서 문단 밖의 재야 비평가로서 문학작품과 비평, 그리고 현 우리의 문단 상황을 자유롭고 흥미 있고,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 (중앙일보, 1994. 2. 16.) 

☞ 남의 눈치 살피지 않고, 남의 생각을 모방하지 않고, 남의 이론을 빌려오지 않고 쓰여진 대담하고도 참신한 독특한 문학비평서. (주간조선, 1993. 12. 9.) 

☞ 이창국 교수가 용기 있는 비평가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이러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주장을 거침없이 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시기적으로는 가장 불리할 때 하고 있다는 것과, 소영웅주의나 상업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문학 사랑의 정신이 그의 글을 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 우상균 공주대 영문과 교수 (외국문학, 1944. 여름. 제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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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류의 생물들 가운데 이야기를 꾸며서 할 수 있는 재능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천부의 능력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이 재주가 특별히 뛰어나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그런 사람들이 가끔 있다. 이런 사람들을 우리는 넓게는 예술가, 좁게는 문인이라고 부른다. 예술가는 그가 사용하는 방법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들에게 어떤 종류의 이야기를 들려주어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사람이다. 그것이 돌에 새긴 하나의 짐승이건, 화폭에 담겨진 사과이건, 글자로 인쇄된 한편의 짧은 시나 두툼한 책으로 이루어진 길다란 소설이건 간에, 그것이 예술작품일 때는 어느 것이나 우리에게 어떤 종류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다른 일은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예술가는 될 수 없다. 문학의 경우는 더욱 더 그렇다.

         문학비평가는 남이 한 이야기 속에서 자기 이야기를 찾아내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비평가는 일급의 이야기꾼은 되지 못한다. 남이 이미 해버린 이야기를 뒤져 그 속에서 어떤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아 또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이 일은 아무래도 화려한 현역 운동선수의 그 명예나 영광은 따를 수 없고, 그 경기를 중계하는 아나운서 옆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보태어 시청자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기 해설자의 역할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평가가 하는 일이 재미없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운동경기를 정작 줄기고 개개 선수가 잘하고 잘못하는 것, 정작 어려운 동작이나 고도의 기술을 즐기고, 지적하고, 칭찬하는 일은 코트에서 뛰고있는 선수들 자신의 것이 아니라, 관중석에 자리 잡고 앉아 그 경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경험 많은 관중들이나 노련한 경기 해설자의 몫이듯이, 문학작품을 정작 즐기고 그것의 잘된 점과 잘못된 점을 칭찬도 하고 비난도 하는 재미를 최고도로 맛보는 사람들은 실제로 소설이나 시를 쓰는 작가가 아니라 현명한 독자들과 이 일을 전문으로 하는 문학비평가이다.

         나는 지금까지 감히 시나 소설은 한편도 써보지 못하고 오직 남들이 써놓은 글들을 읽으면서 반평생을 살아왔다. 그렇지만 이렇게 오랜 세월 남의 글을 읽어오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 글에 대한 눈은 좀 트였다고 생각된다. 그 증거는 남이 써놓은 글을 읽고는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하여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지고, 하지 않고는 배기자 못하고, 그리고 신기하게도 어떤 사람들은 나의 이 문학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칭찬도 해주고 즐거워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비록 나 자신이 만들어 낸 신선한 이야기는 못되고 남이 먼저 고생하여 만들어 낸 이야기를 가지고 벌이는 이급의 이야기일망정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고맙고 신바람 나는 일이다. 나의 문학비평 이야기는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이 책은 문학에 관한 심오한 지식이나 날카로운 지성의 산물은 아니다. 길고 긴 겨울 밤  사랑방에 모인 시골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소박한 것들이다. 듣다가 재미없으면 슬며시 눈을 감고 잠들어버리면 그만이고, 자다가 깨어나 아무데서나 듣기 시작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런 것들이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어떤 에피소드는 나 자신도 오래 전 어디선가 누구로부터 들었거나 읽은 것이어서 그 출처가 희미하고 정확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이야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되면 주저하지 않고 사용하였다.

         이 책 속에 들어있는 여러 제목의 서로 다른 이야기들은 하나 하나가 제각기 독립되어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은 작은 개울들이 모여들어 하나의 큰 강을 이루듯이 하나의 긴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나 하나의 이야기가 시냇물이라면 이 책은 그것들이 모이고 합쳐서 이루어진 문학이라는 이름의 강이다. 나일강이 흘러 주변의 땅을 비옥한 옥토로 만들어 주듯이 문학은 우리에게 즐거움과 위안을, 마음의 평화와 삶에 대한 용기를 가져다 주어 우리를 정신적으로 살찌게 만들어 준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은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며, 가치 있는 것이며, 사랑 받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 발견되는 문학작품들 가운데는 우리의 타고난 맑은 정신을 혼탁하게 만들고, 아름다운 것, 참된 것, 진실된 것을 추구하고자하는 갈망을 채워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본능적으로 추한 것, 천한 것, 경박한 것을 멀리하고자 하는 우리의 타고난 감각이나 능력을 둔화시키거나 약화시키는 것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다. 나의 부드러울 수밖에 없는 문학 이야기가 때로는 좀 차갑고 따가운 논조로 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나의 이야기는 독자들의 문학에 대한 판단력이나 분별력을 혼란시키는 요소나 요인들을 가능하면 많이 자주 들추어 독자들의 양식과 상식에 새삼스럽게 호소하여 문학 본래의 모습을 되찾고 영원히 변치 않고 면면히 계속되는 문학의 진정한 위상과 가치를 정립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결과는 누가 보아도 그리 만족스러운 것은 못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조소나 경멸의 대상일 수도 있다. 그 원인은 문학이라는 예술에 대한 나의 별 수 없는 감상능력과 모자라는 지식에 전적으로 기인한다. 그렇지만 구태여 변명을 해 본다면 그것은 문학이 가지고 있는 신비스런 본성에 기인한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깊이 들어가면 들어 갈수록 어두워지는 동굴 속같이, 다가가면 다가 갈수록 멀어지기만 하는 무지개 같이, 문학은 자신에게 접근해 오는 사람에게 그 정체를 결코 쉽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계속 쫓아오라는 손짓만 하는 그런 존재이다.

         문학은 어느 한 사람이 담당하기에는 그 종류가 너무나 다양하고 그 범위가 너무나 넓다. 어느 비평가가 제아무리 문학에 관하여 박식하고 유능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다루어야 할 대상은 어느 한가지 정해진 기준이나 방법, 또는 이론에 의하여 그 본질을 모두에게 만족스럽게 밝혀내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한 비평가가 보고 다루는 문학작품에 대한 비평활동은 결국 문학의 한 부분이거나, 독특한 양상, 또는 특수한 현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한 비평가의 말에 작가가 필요 이상의 과민한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 어차피 비평가는 코끼리의 코만 만져보고 코끼리는 커다란 뱀과 같은 동물일 것이라고 단언하는 장님의 독단과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수록된 문학에 관한 이야기들은 문학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것을 사랑하는 정열에 있어서는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한 사람의 독백과도 같은 것이다. 문학은 마땅히 아름답고, 착하고, 선한 것이어야만 하고, 궁극적으로 독자들을 이 방향으로 교육시키는 효과를 가져야만 된다는 확고하지만 좀 고지식하고, 약간 시대에 뒤진 생각을 가진 사람의 눈으로 우리 주변의 문학작품을 바라보니, 마음에 들지 않고 비위에 맞지 않는 현상도 적지 않아 자연히 본의 아니게 불만을 토로하는 글이 의외로 많아져 버렸다. 그러나 이 불만의 목소리는 맑은 샘물을 찾아 사막을 헤매는 목마른 사람의 신음과 다름없는 것으로서 진정한 문학의 나무와 샘이 있는 오아시스에 도달하는 순간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릴 성질의 것이다.

         끝으로, 나의 문학에 대한 이 글들이 진정으로 문학을 사랑하고, 문학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며, 문학에서 즐거움과 놀라움, 삶에 대한 위안과 용기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 그들에게 다소나마 어떤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간절한 소망이다. 그리고 진정으로 본받을만한 산문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요즈음에 이 이 책 속에 들어있는 나의 글들이 그 내용만이 아니고 특별히 훌륭하다거나 뛰어나지는 못할망정 크게 흠잡을 수 없는 산문의 한 본보기로서 극소수의 독자들에게라도 받아들여진다면 이보다 더 큰 보람과 영광은 다시없을 것이다. 
                                    2002년 5월 30일        저자 이창국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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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문학작품이라는 것을 접하게 되고, 또 그것을 읽고 좋아하게 되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스스로 시나 소설을 써보겠다는 야심을 품게되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고 하겠으나,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중고등학교의 국어 교과서를 통해서가 아닌가 한다. 교과서에 나오니 누구나 읽어야만 되고 또 학기말 시험이나 대학입학 시험에도 나오니 읽고 감상할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분석, 비판도 하게된다. 그리고 술이나 담배로 흐리멍텅해지거나 굳어진 어른들의 머리가 아니라,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읽게되기 때문에 이 때의 문학작품에 대한 인상은 상당히 강력하게 우리 마음 속에 남게 마련이다. 이때 비록 얼마 되지 않는 분량의 한국 문학작품, 구체적으로 몇 편의 시에 현혹되어 법학이나 의학을 공부하여 판사나 의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부모님들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고는 문학을 전공하겠다느니 시인이 되겠다느니 하여 부모님들의 속을 썩이는 학생들이 생겨나는 것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몇 편의 시가 갖는 힘이란 것도 때로는 무시할 수 없이 크다는 사실도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중요한 시기에 중고등학교의 교과서를 통해 학생들이 접하게되는 우리 문학작품들을 교실에서 가르치는 방법, 특히 교사들의 방법과 태도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교사 개인에 따라서는 물론 차이가 있다고 하겠으나 국어 시험문제, 국어 참고서의 해설문, 그리고 수만 명의 시청자를 상대로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유능하다는 대표적 국어교사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TV과외지도 내용을 종합하여 판단하여 볼 때, 분명 여기에는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너무 획일적이요, 공식적이요, 도식적이다. 어떤 수학문제를 푸는 것 같이 가르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정책입안이나 결정, 또는 시행과정에서 지적되는 가장 관료적인 악습으로 지적되어 온 병폐가 어느덧 문학작품의 해석이나 감상 그리고 비평에도 침투하여 이제는 감히 누구도 허물어 버릴 수 없는 견고한 편견과 독단의 아성으로 굳어져버린 것이다. 선생님들도 그렇게 가르치고, 학생들도 그렇게 배운다. 대학 입학시험에도 그렇게 출제되고, TV과외 교사는 더욱 자신 있게 그렇게 설명한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잘못된 태도는 쓰여진 작품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이다. 일단 국정 교과서에 활자로 인쇄되어 나오고 나면 그것은 무조건 우수하고, 거룩하고, 완벽한 것으로 간주되어 이것이 가질 수 있는 결점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비평도 시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그 작품은 아주 우수한 완전무결한 작품으로 미리 정해놓고 시작되기 때문에 그 작품 자체에 대한 이의는 제기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옥에도 티가 있다는데. 내가 고등학교 학생일 때 국어 교과서에서 읽고 그때도 좋아했고 지금에 와서도 변함 없이 좋아하는 시에 유치환(柳致還, 1908-1967)의 "깃발"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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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깃 발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이 시에 대하여 공식적이라 할 만큼 따라다니는 도식적인 설명은 한 잘 알려진 참고서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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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시어의 철저한 절제와 표현의 묘를 살려, 깃발이 갖는 이미지를 선명하고도 계속적인 파동감으로 높이 승화시켜 놓고 있다.
즉 빈틈없는 이미지의 전개가 중첩적으로 이루어져 나가는 가운데, 시적 긴장이 아우성, 손수건, 순정, 이념의 푯대, 애수, 마음 등의 주요 시어에 연결되어 완벽한 표현에 이르고 있다.

         위와 같은 이 시에 대한 평가는 아마 다른 국어 참고서에는 표현상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 비슷하다고 하겠으며, 이 시를 하나의 완벽한 작품으로 치켜올리고 있다는 사실에는 모두 일치하고 있으며, 교실에서 학생들을 직접 지도하는 교사들도 대부분 이상과 같은 전제 아래서 학생들에게 이 시를 이해시키고자 할 것이다.

         나는 그 때도 그랬고 지금도 이 시를 퍽 좋아하지만 항상 세 번째 줄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에 항상 불만을 느끼고 있다. 우선 순수한 우리말이 아닐 뿐만 아니라 채 외래어로 굳어지지도 않은 노스탤지어란 말도 좀 쑥스럽게 느껴지지만, 그것은 그렇다 치고, 이 말과 함께 쓰인 손수건에 와서는 더욱 불만이 가중됨을 느낀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깃발이건 간에 그것이 깃대 위에 높이 매달려 바람에 펄펄 힘차게 휘날리는 모습을 바라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시의 시원하고 힘찬 시각에 크게 공감할 것이다. (사실 멀리서 바라보지 않고 가까이서 볼 것 같으면 그 펄럭이는 소리 또한 대단하다.) 그런데 세 번째 줄에 와서 그 힘찬 기상이나 큰 스케일이 갑자기 뚝 떨어지고 줄어들어 맥이 없어진다.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때문이다. 손수건이란 물건은 이마의 땀을 훔치거나 재채기를 하고 난 다음 콧물이나 눈물을 닦는데 주로 쓰이는 것으로서, 바다를 향하여 펄펄 휘날리는 깃발과는 거리가 먼, 작고, 힘없고, 때로는 더럽기도 한 이미지를 가져다 주는 단어로서 이 시의 장쾌한 흐름을 갑자기 멎게 만드는 부적당한 물건이요, 이미지요, 어휘이다. 시인은 좀더 좋은 알맞은, 적절한 우리말을 찾을 수 없었을까? 아쉬운 일이다.

         이와 같은 필자의 비평은 지극히 부분적인 것으로서 공연히 트집잡는 식의 비평으로 무시해 버려도 그만일 것이다. 그러나 활자화되어 국정 교과서에 실리고 나면 무조건 완전무결한 것으로만 치켜올리는 우리의 교육풍토에 있어서 이와 같은 안목을 학생들에게 키워주는 것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 세상에 완벽한 것이라는 것은 참으로 드물다는 사실을 우리는 우선 알아야 할 것이다. 특히 사람이 쓰는 글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한용운, 이육사, 윤동주, 이상화 등이 쓴 시들이 대개 한 두 편씩 교과서에 실려있다. 그 이유는 우선 이 시인들이 남긴 작품들이 우수하다는 이유도 있겠으나, 또 한편으로는 이들이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기고 식민지 상태에서 억압받고 지나던 시절의 고통을 표현한 애국적 민족시인이라는 면에서, 이 시인들의 작품을 우리 젊은 학생들로 하여금 읽게 만드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뜻도 있다고 하겠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애국민족시인이 쓴 시는 그 내용이 어떠하더라도 무조건 애국시라거나 항일의 뜻을 갖는 저항적인 시로 도식화하는 습관성 오류도 이제는 불식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이육사(李陸史, 1904-1944)의 잘 알려진 시 "청포도"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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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포 도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에 주절 주절이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멀리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 시가 수록된 에서 출판된 『민족시인』(1968)이라는 두툼한 책에는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다음과 같은 멋진 평을 싣고 있다.

시사적인 희구와 무아(無我)한 성격, 티끌 없는 명랑성 등이 표출되어 가장 많이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는 그의 시 청포도와 같은 작품엔 지순한 그의 인품이 잘 투영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표현된 흰 돛단배나, 청포를 입고 찾아오는 손님이란 결국 잃어진 조국을 찾아 투쟁하는 지사들의 표징에 틀림이 없고, 하이얀 모시 수건 등이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의 펼침인 것은 말할 나위 없다.

         "청포도"란 시에 대한 이상과 같은 설명은 이육사의 이 "청포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이육사의 다른 시들, 예를 들어, 그의 "광야"나 "절정"등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며, 이육사의 시뿐만 아니라 한용운, 윤동주, 이상화의 어떤 시에도 가져다 붙이는 판에 박은 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해석은 중고등학교 국어시험에도 나오고 대학입시에도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외워서 그렇게 대답하지 않는 사람은 바보 취급을 받게 되고, 성적도 떨어지고, 대학 입학시험에 떨어질 위험도 크다고 하겠다.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여기에서도 이 "청포도"라는 시가 시로서 하등의 결점이 없는 완벽한 작품으로 여기고 시작하는데 있다. 이 시가 시로서 과연 잘된 작품이냐? 잘 되었다면 어떤 면에서 잘되었는가? 결점은 없는가? 결점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인가? 이런 질문은 아예 시도하지 않는 것이 관습으로 굳어진지 오래이다. 그저 황홀하고 감격할 따름이다. 그 다음의 문제는 아무 것에나 조국이니 독립이니 투쟁이니 하는 거창한 말을 가져다 붙이는 일이다.

         애국 시로서, 항일 시로서, 저항 시로서 육사의 "청포도"를 본다면 그것은 아주 보잘것없는 시이다. 어느 한군데 그런 애국적이거나 저항적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시의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그리고 대부분의 편견 없는 독자들이 그러하듯이, 이 시를 하나의 소박한 아름다운 정서의 표현으로 받아들일 때, 이 시는 그런 대로 읽고 즐길만한 아름다운 시이다. 이 정도의 잘된 시도 드물다. 그렇다고 이 시에서도 결점을 찾아낼 수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교사들이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학생들로 하여금 바로 이런 결점도 동시에 찾아내는 눈을 가질 수 있도록 장려하고 격려하는 일이다.

         이 시도 시작은 아주 좋다. 아름다우며 포근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이렇게 잘 나가다가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부터 이상해지기 시작하여 마지막 연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에 가서는 그 이상함과 어색함이 절정에 도달한다. 우선 청포(靑袍 )라는 어휘가 뜻하는 바나 상징하는 바가 정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풍속에 적합하지도 않다. 청포란 푸른색의 도포, 즉 푸른색의 두루마기란 말인데 우리나라 사람이 한 여름에 이런 옷을 입는다는 사실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이다. 혹시 중국 사람인가? 제목이 청포도이니까 여기에 소리를 맞추었다는 의도 이외에는 무엇에 연결시켜 보아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 맨 마지막 연은 더욱 이상하다. 식탁은 웬 식탁인가? 우리가 언제부터 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나? 은쟁반에 하얀 모시 수건은 또 무엇인가 양식()이라도 들 참인가? 이 시의 배경은 아주 호젓한 시골이요, 이 시가 쓰여진 시기는 우리 민족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주 고통스럽고 참담한 생활을 해야만 했던 시기였음을 감안하여볼 때, 이와 같은 귀족적인 그리고 사치스런 이미지를 가져오는 어휘의 사용은 이 시를 저항적, 항일적 애국 시로 해석함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이 시 자체의 구성상의 결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 시의 시작에 알맞은 우리의 전통적인 손님맞이 풍속을 보여주는 좀더 자연스럽고 적당한 말과 표현방법이 있음직도 한데 이 시인은 어색한 끝맺음을 하고 있다. 유감스런 일이다.

이와 거의 비슷한 종류의 잘못은 그의 유명한 시 "광야"(曠野)에서도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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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 야 (曠 野)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서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 시도 문제는 마지막 세 줄이다. 이 시도 잃어버린 조국의 독립을 기다리는 애국 시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 시의 마지막 세 줄을 제외하고는 억지로 그런 의미를 부여하기 전에는 제목이 시사하는 그대로 하나의 광대한 들판을 노래하는 자연예찬의 시이다. 그리고 이런 뜻에서 이 시는 참으로 아름답고, 또한 그 묘사에 있어서도 광활한 평야를 적절한 어휘로써 표현하였기 때문에 크게 성공한 작품이다. 한마디로 아주 시원하다. 그러나 이 시의 마지막 종결부분 세줄,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부분이 또 마음에 걸린다. 다시 한번 자세히 뜯어보자.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시인은 바로 위에서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라고 끝을 맺었다. 그러니까 마지막 세 줄은 이 시인이 뿌린 노래의 씨를 어떤 형태로든지 수확하여 거둬들이는 형식이 되어야만 논리상 맞을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우선 가난한 노래의 씨가 싹이 트고 열매를 맺어 후세의 여러 사람들에 의하여 읽혀지고 애송되기를 바라는 시인 모두의 공통적인 소망을 말하고 있다고 보면, 우선 "백마 타고 오는 초인"에 걸려 그 뜻이 애매하여진다. 이 시에서는 분명 백마 타고 오는 초인 한 사람이 부르기를 바라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렇다면 이 마지막 세 줄은 시인의 가난한 노래와는 독립시켜 해석해볼 수  밖에는 없다. 시인은 이 광대한 평야를 노래 부르기에 능력이 모자라 그저 소박한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는 것으로 만족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후세에 더 위대한 시인이 나와서 이 광야의 진정한 웅대함을 노래 불러 달라는 그런 뜻으로 말이다. 이렇게 해석을 하면 그런 대로 논리는 통하나, 여기에 사용된 어휘의 어색함은 또한 그대로 남는다. 우선 눈에 거슬리는 것이 백마를 타고 오는 초인이다. 백마를 탄 초인이라면 아더왕 전설에 나오는 원탁의 기사라면 몰라도 우리 동양 사람들의 정서와는 우선 거리가 먼 존재이며, 더군다나 위대한 시인을 백마를 탄 초인에 비유한다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거기다가 "목놓아"라는 말은 더욱더 어색하다. 백마 탄 초인(슈퍼맨)이라면 소리 높여 또는 기운차게는 몰라도 목놓아 부른다면 우스꽝스럽다. 남편을 잃은 아내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두 다리 쭉 뻗고 엉엉 우는 모습이다.

         그저 아무것에나 가져다 붙이기를 좋아하는 어떤 해설자들은 이 백마를 탄 초인은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 조국의 독립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 이런 애국적인 해석에 감히 이의를 제기하고 나설 무뢰한도 우리나라에는 별로 없다. 그러나 여기서 우선 지적해야 할 것은 상징이라는 것은 아무데나, 아무 것에나 가져다 붙이면 되는 것이 아니다. 크게 양보하여 그것이 조국의 독립의 상징은 아니더라도 시인이 아마 그런 뜻으로 사용하였을 것이라고 인정하고 나면 논리상 "천고"라는 단어가 또 문제가 된다. 천고(千古)라는 단어의 뜻은 아주 긴 오랜 세월이란 뜻으로서 당시 우리 조국의 독립은 하루 한시가 급한 상황인데 천고 뒤에나 보아야 할 것이다. 이래저래 이 시의 마지막 세 줄은 문제를 안고 있음이 틀림없다.

우리들이 즐겨 입고 또 잘 알려진 시에 윤동주(尹東柱,1917-1945)의 "서시"(序詩)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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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시(序 詩)


죽은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 시에 대해서도 한림출판사에서 간행된 『한국 현대시』(홍윤기 편, 1987)에 다음과 같은 해설이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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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망한 존재의식, 자아에 대한 내적 응시와 분열, 일제의 감시로 인한 강박관념과 
조국광복의 염원을 내용으로 하는 그의 시에 있어서, 이 작품 또는 미력한 힘이나마 
현실에 저항하며 꿋꿋하게 살아가려는 자세를 노래하고 있다.

         위에 인용된 것과 같은 친절한 설명이 독자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는 주장하지 않겠다. 그러나 위와 같은 해설이 이 시에 대한 어떤 선입견을 강하게 심어주고 있다는 점은 지적하여야겠다. 필자 개인의 느낌으로는 그저 마음 착한 (동시에 현실에 저항한다거나 현실과 싸우기에는 너무 여린) 시인의 개인적인 독백으로 받아들여진다. 현실에 저항한다거나 꿋꿋하게 살아가려는 자세보다는 오히려 소극적이고 체념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 시의 구성에 대해서도 한마디 지적해야겠다. 지금까지 시인 윤동주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많이 이루어져 온 것으로 알고 있다. 국문학도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윤동주 시를 연구하여 해마다 박사학위를 받고 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은 이 시인을 애국지사로 떠받드는 데만 급급하여 이 시인이 남긴 작품에 대해서는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칭찬만 하고 있으며, 그의 시 속에서 그의 애국적이고 독립지사적인 면을 찾아내고 부각시키는 데만 골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애국지사로서의 윤동주는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고 하자. 그러나 그가 남기고 간 많은 시들은 하나같이 다 좋은 것만 있는 것은 몰론 아니며, 이미 잘 알려지고 정평이 나있는 시도 잘 뜯어보면 여기 저기에 결점이 드러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현상은 비록 윤동주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이육사, 한용운, 이상화 등등의 시에서도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애국지사와 훌륭한 시인은 구별되어져야만 한다.

         위에서 인용한 윤동주의 "서시"(序詩)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이 서시의 맨 마지막 줄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는 그럴듯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이 시의 구성상 특별한 의미나 관계가 없는 군더더기 말이다. 소속 불명의 문장이다. 없어도 되고, 없었으면 차라리 더 좋았을 것이다.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그나마 드러난 시인의 현실에 대한 각오가 희미해지고 시인의 의지를 나약하게 만들고 있다. 이왕 한 줄을 더 쓸 의도였다면 이 보다는 더 좋은, 시의 본문과 잘 융화되는, 그리고 시를 깔끔하게 끝맺는 그런 문장을 썼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

         이왕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지고 또 여러 사람들에게 사랑 받는 시들을 골라 그 결점을 잡겠다고 나선 이 마당에 한편만 더 끄집어내어 그 흠을 잡아보겠다. 조지훈(1920-1968)의 대표작 "승무"(僧舞)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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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 무 (僧 舞)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깍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우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梧桐)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어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 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하늘 한 개 별 빛에 모두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울어새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조지훈의 이 "승무"는 아마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계속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시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일 것이다. 그 자아내는 분위기가 너무나 조용하고 아름답다. 사용된 어휘들도 한자(漢字)와 잘 어우러져 자연스럽고 여기에서 생겨나는 이미지도 아주 선명하다. 아름답고도 조용하다. 한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이 시의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시는 제목인 "승무"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춤을 묘사하고 있다고 하겠는데, 춤이란 것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춤이건 간에 몸의 움직임, 즉 동작이 그 전부를 이루고 있다. 승무도 그 예외는 아니다. 서서히 시작되는 승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당히 격렬한 몸짓으로 끝나는 춤이다. 그런데 이 조지훈의 승무에는 그런 격렬한 움직임이 없다. 너무나 처음부터 끝까지 정적()이다. 마치 승무를 추고있는 한 여승을 그린 그림 같다. 제목을 승무라 하지말고 "승무도"(僧舞圖)로 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시라고 해서 사실이나 논리를 무시한다거나, 부적당한 어휘나 걸맞지 않는 비유를 사용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게 써도 괜찮은 것처럼 가르쳐서도 안될 것이다. 초가집을 지을 때는 초가집에 어울리는 자료를 써야 하듯이, 지어야하는 시의 주제와 목적에 맞는 어휘가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초가집에다가 서양식 유리창을 단다든지,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한다면 걸맞지 않는 것처럼, 시에 사용되는 어떤 어휘가 전체를 훼손하거나 이상스럽게 보이게 만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일은 번쩍거리는 것이 모두 황금이 아니듯이, 종이 위에 활자화되고 시처럼 보이게 쓰여진 것이라고 모두 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알려주는 일이다.
         위의 글에서 필자가 예를 들어 흠을 잡아본 시들은 누가 뭐라 해도 우리나라 시인들이 쓴 시들 중에서는 뛰어난 것들이요, 가장 많이 읽히고 사랑을 받고 있는 시들이다. 보석 같은 것들이다. 옥에도 티가 있을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 한 번 그 흠을 잡아보았다. 이와 같은 흠잡기도 문학비평의 한 부분이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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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독서론


         인간이 지구상에 태어나 상당한 기간 다른 동물이나 다름없는 원시적 생활을 영위한 후 차츰 문명생활의 길로 들어선 이래 인간만이 달성하고 소유하고 발전시킨 것들이 수없이 많지만 그 가운데 글자를 만들어 어떤 방법으로든 필요한 것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것이다. 그 방법이 처음에는 원시적이고 유치하였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신기하다면 신기하고 괴상하다고 하면 괴상하기조차 한 이 인간활동은 세련되고 발전을 거듭하여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오늘에 이르렀다. 여기에 필연적으로 생겨난 것이 책이다. 책의 생명은 최소한의 부피를 가지면서 최대의 분량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이 한번 만들어지고 나면 종이가 썩어 없어질 때까지 그것을 소유한 사람은 언제 어데 서나 그 내용을 두고두고 이용할 수 있다는 반영구성에 있다. 그 내용이 어떤 것이던 간에 책으로 기록된 모든 것들은 지식으로 굳어져 후세 사람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이 지식의 축적은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이 지구상에서 다른 동물들을 제압하고 단연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이 지식을 남보다 더 많이 더 빨리 습득한 사람은 인간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두각을 나타나게 되었고 사회의 지도자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이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말하기 훨씬 전부터 지식은 힘이었고, 지식 있는 사람은 힘있는 사람이 되었으며, 이 지식의 원천은 바로 책이었다. 책은 오래 전부터 지식의 창고로서 미개와 야만으로부터의 탈출구로서, 문명으로 통하는 신작로로서, 힘의 원천으로서, 사회에서 출세하는 도구로서, 인간사회와 의식 속에 깊숙이 자리잡게 되었다.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아 책을 한 권 만든다는 일이 지극히 어려웠으며, 또 이렇게 만들어진 한 권의 책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그것을 일일이 베껴서 가져야만 했던 시대에는 귀중한 책을 남보다 먼저 소유한 사람은 산신령이 일러준 비법이나 비방(秘方)을 전수 받은 신통력 있는 도사처럼 단연 남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책이 너무 많고 흔해서 그 가치가 상대적으로 약화된 오늘날에 있어서도 학기말 시험을 앞두고 도서관에 먼저 달려가 그 분야에 관한 참고서적을 남보다 먼저 더 많이 손에 넣은 학생이 더 좋은 페이퍼나 리포트를 작성하여 담당교수로부터 더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 결국 인간사회에서는 좋은 내용이 들어 있는 책을 남보다 먼저 손에 넣어, 그것을 가능한 한 빠른 시간 안에 많이 머리 속에 집어넣어(암기하여) 필요한 때에 꺼내어 사용할 수 있게 된 사람이 자기보다 체격이 훨씬 크고 힘이 세어 더 큰 칼을 휘두를 수 있고, 더 빨리 달릴 수 있고, 더 큰 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제압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종이로 만들어지고 그 위에 새까만 글자로 인쇄된 책은 신통한 위력 내지 마력을 가진 물건이 되어 버렸으며, 태어날 때부터 이것에 흥미를 느끼지 않는 사람이거나, 어떤 이유로든 이 책이란 것을 가까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책은 가히 공포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도 정도의 문제일 뿐 사실이다. 이제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그 사실 때문에 누구로부터 호되게 나무람을 당해도 감히 반격을 할 수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 버렸다.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제 한 개인의 문제를 떠나 사회적으로도 매도(罵倒)되는 시대이다. 독서주간이나 책의 해 등과 같은 행사를 정부가 주관하고 선포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처럼 책의 위력이 대단해지다 보니 자연이 책은 싫던 좋던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읽혀지게 되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서 읽고, 싫은 사람이라 하더러도 남의 눈이 무서워 읽게 된다. 읽는 체라도 하게 된다. 그런데 세상에는 선천적으로 책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읽기도 좋아하고, 사서 모으기도 좋아하고, 차곡차곡 정리하여 쌓아 놓거나 책장에 꽃아 놓고 바라보기도 좋아하고, 쓰다듬거나 어루만지기도 좋아한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다. 비좁은 집에 책만 자꾸 사들여 가뜩이나 비좁은 집을 더욱 비좁게 만들어 아내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큰 자랑이나 낙으로 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쌀을 사서 가족들이 밥지어 먹을 돈을 몽땅 털어 귀한 책을 사 모았다는 비정한 장서가의 눈물겨운 이야기도 우리는 가금 심심지 않게 들을 수 있다. 분명해지는 사실은 책을 읽는다는 일을 물론, 책을 그냥 소유한다는 일 자체도 하나의 개인적, 사회적 덕목이 되어 버렸으며, 책을 읽지 않는다던가, 책을 멀리하는 사람은 이래저래 서름 받는 그런 시대이다, 이와는 반대로 특별히 잘하는 일도 없고 아무런 착한 일이나 좋은 일은 하지 않으면서도 손에 책만 붙잡고 않아 있는 사람은 이상하게도 누구에게 비난이나 조롱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모든 다른 결점조차도 그것 하나로 용서되고, 은폐되고. 심지어는 미화되기도 한다.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책을 읽는 행위를 경건하고 신성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책을 읽는 행위는 그것의 기본적인 성격상 종교적 의식과도 상통하는 점이 있다. 책을 읽으려면 우선 주변이 조용하여야 하고, 책을 읽는 사람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언제나 혼자이다. 책상이 있어야 하고 의자나 방석도 있어야만 한다. 밤에는 전등이나 전기 스탠드가 있어야만 하고, 그것이 여의찮을 때는 최소한 촛불이나 등잔불이라도 있어야만 된다. 여름밤에는 반딧불로 책을 읽었고 겨울밤에는 흰 눈이 반사하는 그 빛으로 글을 읽었다는 뜻의 고사성어 형설지공()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책을 읽어 성공하였다는 감동적인 사실 이외에, 책을 읽겠다는 열의와 열성, 그리고 책을 읽고 있는 사람의 거룩한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책을 손에 잡고 책을 넘기고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도 쉽게 범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주변이 고요한 속에서(만물이 모두 깊이 잠든 밤이면 더욱 좋음) 혼자 불을 밝히고 (촛불이면 더욱 낭만적임)책상에 앉아 책을 넘기는 모습은 누가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모습이며 거룩해 보이기 조차하다. 더구나 그 책의 내용이 현실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을 전달하여 주는데 그치지 않고, 현실의 잡다한 번뇌를 건너뛰어 영원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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