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의 해부 > 이창국 저서소개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이창국 저서소개

우울증의 해부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이창국
댓글 2건 조회 14,155회 작성일 06-07-05 01:27

본문

teacher.gif

작가 소개 / 로버트 버어튼 ('1577 ~ '1640)     

 
        셰익스피어보다 13년 늦게 태어났지만 그보다 24년이나 더 오래 살고 간 로버트 버어튼은 1593년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였고, 죽을 때까지 소위 스칼라(학비와 기타 비용을 면제받는 일종의 특별우대 장학생)의 신분으로 그곳에 남아 공부만 하다가 죽었다. 그는 어느 곳으로 여행을 한 적도 없었고, 결혼도 하지 않았으며, 어떤 성공을 바라지도 않았고,  이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어놓은 일 이외에는 어떤 세속적인 성공을 이루지도 못하였다. 일생동안 그는 오직 책만 읽다가 죽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사람이다. 그는 또 남들이 잘 읽지도 않고 읽을 수도 없는 난삽하고 난해한 고서적들만을 골라 읽었다. 그의 이와 같은 생활태도와 기질은 아마도 그 자신이 이 우울증의 해부에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듯이 그의 신체상의 균형과 조화를 깨뜨렸으며, 그의 몸 속에 우울증의 원인이 되는 검은 담즙즉 메랑콜리의 과다생산을 촉발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분명 자신이 이 글에서 이 병에 걸려 시달리고 있으며, 이 병을 치료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써 이 글을 썼다고 밝히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것은 하나의 문학적인 장치 내지 제스처로써 실제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일찌감치 학문의 허와 실을 터득한 현실적인 사람이었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사악함, 어리석음, 탐욕, 광증, 등을 훤하게 꿰뚫어 본 현명한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셰익스피어와 더불어 영국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인본주의적 기독교인이었다.
 

icon_note.gif역자 소개 / 이 창 국

        역자 이창국은 1940년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 양평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쳐, 서울사대부고, 서울대 사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였으며, 미국 펜실바니아주 소재 빌라노바 대학에서 영문학 석사, 귀국 후 서강 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학위 받았다. 현재 중앙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명예교수.

        저서에 문학평론집 『문학비평 이야기』(한신문화사, 1993), 수필집 『다시 한번 강가에 서다』(종문화사, 1997), 『그때는 아무도 호각을 불지 않았다』(드림미디어, 2001)와 영국에서 출판된 영문 수필집 IDEAS & IDEALS (Minerva Press, 1999)가 있다. 번역서로는 『롱펠로 시선』(혜원출판사, 1987), 『테니슨 시선』(혜원출판사, 1993) 등과, 영역 『한국 전래동화집』(금성출판사, 1985)이 있다.
 

teacher.gif

작품 해설


         로버트 버어튼의 『 우울증의 해부』(The Anatomy of Melancholy)는 지금부터 약 400여 년 전 영국의 한 괴짜 학자가 쓴 괴상한 글이다. 그 내용 가운데는 21세기를 살고있는 우리로서는 우리가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 가볍게 웃어넘길 부분, 말도 안 되는 부분도 없지는 않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대단히 흥미롭고, 진실 되며, 동시에 유익하다. 그리고 모든 가치 있는 고전 작품이 그러하듯 이 책도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새롭고 또한 대단히 현대적이다.
  
        이 책은 그 제목이 시사하는 대로라면 우울증이라는 일종의 정신적 질환의 원인과 증상, 종류, 그리고 그 치료법을 설명하고 있는 일종의 의학서이다. 그러나 역자가 이 책에서 우울증으로 번역한 멜랑콜리는 그 범위가 훨씬 확대되어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우울증을 포함하여 우리 인간의 모든 비정상적인 심리상태 - 초조함, 두려움, 시기심, 사랑, 신앙심, 의심 - 등을 유발하는 모든 정신적 질환을 포함한다.

        이 멜랑콜리라는 이름의 병은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지적 또는 정신적인 일에 종사하는 당시의 지식인들(시인, 목사, 학자 등)에게는 의레 따라다니는 아주 흔한, 친근한, 사치스런, 그리고 사랑 받는(?) 일종의 고질병인 동시에 하나의 유행병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을 이루기 전에 더위에 땀 흘리고, 추위에 떨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책을 읽거나 쓴다는 일은 노동 가운데서도 중노동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세네카의 고백을 들어보자, 어느 하루도 나는 한가한 마음으로 보낸 날이 없다. 밤에도 나는 눈을 뜬 채로 누어 있는 것이 예사였으며, 지쳐 눈을 감고 잠이 든다 하더라도 잠 속에서도 그 일은 계속 되었다. 키케로의 고백은 또 어떠한가 들어보자: "다른 사람들이 즐거움을 찾아서 놀러 다닐 때 나는 이 일에만 매달려 있었다." 이처럼 학자들의 일이란 힘들고 따분한 일로써 그 대가는 건강의 상실, 재산의 탕진, 정신의 혼미, 그리고 때때로 생명조차 잃는 것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토레미가 철학과 천문학을 한답시고 날려버린 재산이 얼마나 되는 지 아는가? 어느 제왕의 몸값보다 더 많은 돈을 썼다. 테베트 벤코라트는 천체의 운동을 발견하느라고 사십 년 이상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지식을 얻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가난한 학자들이 그들의 타고난 온전한 정신을 모두 잃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세상사를 무시하고 소홀히 함으로써 바보 멍청이가 되고, 자기의 건강, 재물, 그리고 행복을 희생하고, 급기야는 자신의 고귀한 생명까지 잃는 일을 오늘도 계속하고 있는가? 이렇게 해서, 이 고생과 세상의 비웃음을 사면서도, 그들이 이루어 놓은 일에 대하여 세상의 평가는 어떠한가? 한마디로 냉대와 조소뿐이다. 이런 학자들은 어리석은 사람, 바보, 멍청이로 취급받았으며, 사회에서 냉대 받고, 멸시받고, 조롱당하고,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정신병자 수용소에 가서 물어 보라. 아직도 제정신이 있어 당신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흉악한 몰골 때문에 바보나 걸레 대접을 받고 있을 것이다. 칠 년 공부에만 매달려 산 학자는 어느 시인의 표현에 의하면:

이 사람 말 없기는 시장 터에 세워진 동상 같고,

사람들은 이 사람만 보면 허리가 휘도록 웃는다. 

 

 

melanbur.jpg

         왜냐하면 학자라는 자들은 누구나 타고 다니는 말도 탈줄 모르고,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도 구애는 물론 인사도 제대로 건넬 줄 모르고, 접시 위에 놓인 고기도 제대로 썰 줄도 모르며, 재미있는 이야기도 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른 사람에게 책임이나 비난이 돌아갈 일이 아니다. 바로 자신들의 책임이다.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학자는 바보다.

        학자라는 작자들은 항상 혼자서 명상에 잠겨 쭈그리고 앉아있는 사람들이다. 이게 그들의 행동과 자세의 전부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우를 들어보자. 이 친구는 프랑스의 루이 왕과 저녁을 하는 자리에서 별안간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마니키스 교도들은 틀렸어!라고 고함을 질렀다고 전해진다. 그러니까 왕과 식사를 하면서도 이 친구의 머리 속에는 읽고 있던 책의 내용이나,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왕을 비롯하여 식탁에서 같이 식사를 즐기던 다른 사람들의 놀라움과 당황함을 뒤늦게 깨달은 아퀴나스는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고 한다. 상식에 어긋난 행동을 함에 있어서는 알키메데스 또한 예외가 아니다. 히에로 왕의 금관에 과연 얼마만큼의 금과 은이 섞여 있는가를 알아내라는 왕의 명에 따라 이 문제를 푸는 데 골몰하던 알키메데스는 목욕을 하는 도중 해답을 알아내자 알았다!라는 외침과 동시에 목욕탕에서 뛰쳐나와 옷도 입지 않고 벌거벗은 채로 그대로 왕에게 다려갔다고 한다. 미친 듯이 겅중겅중 뛰면서 알았다, 알았다. 해답을 찾았다,라고 계속 외치면서.

        이 친구는 항상 자기가 하는 공부에 열중하여 있었기 때문에 주변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살고 있던 아테네 시가 적군에게 함락되고, 군인들이 들이 닥쳐 자기 집을 수색하였으나 그는 어째서 낯선 군인들이 자기 집안을 뒤지는지 몰랐으며, 알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아예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세인트 버나드는 하루 종일 레만 호수 가에 앉아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이 호수의 이름이 무어요?하고 물었다. 사람들은 나의 스승 데모크리투스의 마차만 보면 미친 사람이 왔구나 하고는 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얼른 사람을 보내 의사 히포크라테스를 모셔왔다. 좀 엄숙한 사람들 틈에만 가면 계속 웃는 것이 그의 병이었다. 반면에 헤라클리투스는 이유 없이 우는 것이 그의 병이었고, 라에르티우스라는 학자는 미친 듯이 길거리를 뛰어다니면서 나는 마귀들에게 인간이 어떤 짓을 했는가를 알려주기 위하여 지옥에서 온 사자다,라고 외쳐대는 것이 그의 지병이었다.

        학자들이 아끼고 높이 평가하는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예외 없이 어리석고, 융통성이 없으며, 외모는 연약하고 행동에는 활기가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웃음거리가 되기 일수이고, 세상사에는 아주 무식하고 서투르다. 이들은 하늘에 있는 천체들의 운행을 연구하고 측정할 수 있으며, 지구상에 있는 다른 나라의 풍물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지혜를 가르치기도 하지만, 시장에 나가 물건 하나 사는데 있어서나 흥정하는 일에 있어서는 일자무식의 장사꾼만도 못하여 항상 손해를 본다. 이쯤 되면 이 학문을 한다는 사람들, 학자들, 학생들, 정녕 바보들이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귀가 있어 들을 수 있고, 눈이 있어 볼 수도 있을 터인데 어찌 이다지도 세상물정에 어두울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깨우쳐 올바른 생활을 하도록 할 것인가?

        나는 아주 우수한 학자들을 많이 알고 있다. 학식은 머리 속에 가득하지만 예외 없이 세련되지 못하였고, 상식과 예의가 없고, 가정에 소홀하고, 세상물정에 어두운 사람들이다. 내가 잘 아는 학자 한 분은 그의 이웃 농부가 자기네 암퇘지가 새끼를 열 한 마리나 낳았고, 당나귀는 한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고 말해 자기를 속이려고 했지만 자기는 속아넘어가지 않았다고 자랑스럽게 나에게 말하였다. 그는 당나귀가 열 한 마리의 새끼를 낳았고, 암퇘지가 한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고 했다면 믿을 사람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학자라는 사람들은 단순하고, 진지하고, 착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이다. 남들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고, 정직하며, 올바르며,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연적으로 겪어야만 하는 우울증에 대한 보상으로 어떤 사람들은 이 학자들을 높이 평가하여야만 하고 또 크게 존경해야만 된다고 주장한다. 이 학자들이란 사람들은 결국에는 이 세상사람들을 위하여 어떤 중요한 일을 하느라고 인생의 즐거움, 재산, 총명함은 물론, 때로는 생명조차 모두 희생하는 사람들이기에 이들의 노고에 대하여 보통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어떤 특전을 주어야만 한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요즈음에 와서 이 학자들을 위하여 호의를 베푸는 재력가나 권력 있는 보호자의 숫자가 현저하게 감소하고 있다. 시인들에게 주어지는 호의나 특전에 비하면 학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하겠다. 학자들이 일하는 장소는 주로 대학의 울타리 속이거나 골방 속이며, 또 그들이 하는 일이란 것이 남들이 잘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무래도 이들은 하는 일에 대하여 너무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돈도 있어야만 하고, 비용도 들고, 위험도 따르고, 손해도 입는 일이지만 아무도 이들에게 지원을 약속하고 나서는 후원자가 없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즐기는 삶의 즐거움에서 멀어져 조롱 속에 갇힌 새처럼 일생동안 혼자서 외롭게 살아가는 이 학자들에게 돌아오는 보수란 결국 냉대와 경멸, 비참함과 가난뿐이다. 버질은 일찍이 이렇게 적었다:

슬픔, 노동, 걱정, 창백한 병, 비참함,

두려움, 더러운 가난, 아우성치는 배고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이 학자라는 이름의 괴물들.

        이쯤 설명으로도 학자들이라는 사람들이 모두 예외 없이 우울증 환자라는 사실은 명백해 졌다. 이 세상의 다른 직업들은 어느 것이나 칠 년의 수습기간만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면 그런 대로 제각기 자기 밥벌이는 할 수 있다. 무역상인은 위험은 따르지만 배를 띄워 해외에서 상품을 수입하여 큰돈을 번다. 농부의 수입은 거의 확실하다. 다만 이 학자들이 문제다. 이 학자들의 길이란 불확실하고 위험하다. 왜냐하면 책만 손에 오래 들고 있다해서 모두 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무라해서 모두 대들보 감이 될 수 없듯이, 책만 손에 들고 앉아 있다고 해서 모두가 학자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칠 년이 아니라 칠십 년을 붙잡고 앉아 있어도 마찬가지다. 학자가 될 소질과 소양, 그리고 성품이 있어야만 한다.

        시장(市長)이나 관리들은 해마다 새로 갈아치울 수 있다. 그러나 학자는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왕은 기사나 백작, 공작, 자작 등의 귀족들을 마음만 먹으면 만들어낼 수 있다. 박사학위는 대학에서 해마다 생산해 낼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직업이나 물건을 알맞은 수단이나 방법을 동원하면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 아무도, 어느 것도, 학문을 만들어낼 수 없으며, 철학자를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예술가를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웅변가를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시인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세네카가 말하였듯이 우리는 옷을 아주 잘 차려 입은 사람을 보고 참으로 당신은 부자구려, 형색이 좋은 사람을 만나면 당신은 참으로 건강하시군요, 자녀를 많이 둔 사람에게는 당신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을 보고는 당신은 착한 사람입니다, 남의 잘못을 용서해 주는 사람에게는 당신은 참으로 너그럽고 인자한 분입니다,라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은 참으로 학문이 깊은 사람입니다,라는 칭찬의 말을 듣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희생과 대가를 사전에 요구한다.

        우선 학문이 깊은 사람, 즉 진정한 학자를 발견하기가 그리 쉬운 일 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문이란 그리 짧은 시일 안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학자란 그리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학문의 길에 수반되는 모든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고, 그 길에 대하여 충분히 알고 있고, 여유 있는 부모나 후원자가 있어 그 뒤를 잘 밀어준다 하더라도 정작 진정한 학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성격이 온순하고 고분고분해서 주변 사람들의 부당한 비난이나 조롱도 잘 참고 견디어내는 사람일 지라도 머리가 총명하지 못하거나, 애써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풀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없을 때에는 그런 성품도 헛것이다. 처음에는 큰 각오와 정열을 가지고 이 고난의 길로 들어서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의 대부분은 나쁜 친구들의 꼬임에 빠지고, 술과 여자들의 유혹에 빠져 후회하게 되고, 결국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 그만두어 자신의 파멸은 물론 그에게 기대를 걸었던 부모와 친구들, 그리고 후원자들에게 커다란 슬픔만 가져다 준다.

        설혹 그 학문의 길에 들어선 사람이 학자로서의 자질을 모두 갖춘 훌륭한 인재라 하더라도 - 학구적이고, 부지런하고, 머리 총명하고, 인내력이 강하고 - 그의 앞에서 그의 몸과 마음을 노리고 기다리고 숨어있는 수많은 종류의 암초와 복병을 생각해 보라. 이 세상에서 학자의 노동보다 더 힘든 노동은 없다. 남이 못해낸 훌륭한 업적을 남기기 위하여 불철주야 머리를 짜내고,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책과 씨름하다 보면 건강, 재산, 멀쩡한 정신, 그리고 귀중한 목숨 등, 결국 모든 것을 잃게되기도 한다.

        이런 가운데서도 다행히 강철같은 몸을 타고나 무사히 공부를 마치고, 당당하게 학자로써 성공하였다고 가정해 보자. 그동안 그 어려운 공부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총기도 잃지 않았으며 시력도 잃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계속 우등만 했다. 그동안 비용도 많이 들였고, 이제 직장을 얻어 생활을 시작할 때다. 그런데 이 학자가 갈 곳이 과연 어디인가? 그동안 자그마치 이 십 년 간이나 대학에서 썩었지마는 이제 그 바라던 직장을 얻기란 대학에 처음 발을 들여놓을 때나 조금도 다름없이 멀고 아득하기만 하다. 지금부터 과연 어떤 절차를 밟아야만 한단 말인가? 가장 가능성이 높고 동시에 얻기 쉬운 자리는 결국 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 자리이거나, 대학의 강사 자리일터인데 그 일을 하고 받을 수 있는 돈은 고작해야 매 사냥꾼의 수입만도 못한 연봉 십 파운드, 거기에 하루 세끼 식사와 약간의 시간외 수당, 그리고 부자 집 아이들의 부모를 기쁘게 하였을 경우 혹시라도 떨어질 줄 모르는 몇 푼의 부수입뿐이다. 이 자리도 학부모들이 잘 보아주어서 이삼년 해먹을 수 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면 게으르다는 이유로 어느 날 느닷없이 해고를 당한다. 이렇게 되면 쫓겨난 하인처럼 별 수 없이 다른 하교를 또 찾아 나서야만 한다. 이렇게 해서 천신만고 끝에 다른 학교에 자리를 얻었다고 하자. 그 대가는 무엇인가? 호라티우스의 말처럼:

이 학자의 운명은 아이들 가르치는 일,

어느 촌구석 교실에서 품사나 설명하는 일.

        당나귀처럼 그는 먹을 양식을 위하여 시간과 몸을 바쳐야만 한다. 손에는 회초리를 들고, 아이들 못 알아듣는 라틴어도 가끔 써먹으며, 낡아빠진 옷을 걸치고, 지금까지 공부하느라 고생한 대가로 그가 이제 누리는 것은 중노동뿐이며, 몸이 늙어 비실비실 해 질 때까지 간신히 그를 지탱하여 줄 몇 푼의 월급뿐이다. 이것이 전부이다. 학자는 행복한 사람이 아니다. 대학을 나온 사람이 학교 선생 자리 이외에  얻을 수 있는 자리에 목사 자리가 있다. 그것도 대도시의 번듯한 교회의 목사 자리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그런 자리가 이 주변머리 없는 이 사람에게 돌아갈 리가 있겠는가? 기껏해야 어떤 부자 집 가정교사 겸 개인 목사 자리다. 그러나 이 자리도 지체 높은 주인이나 주인 나리의 부인의 마음에 들어야지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당장 문밖으로 쫓겨난다. 결국 공부를 해서 그것을 가지고 밥벌이를 해보겠다는 사람들은 - 학자, 시인, 수사학자, 역사가, 철학자, 수학자 - 여름 한철 신나게 나무 그늘 속에서 노래부르고 나서 추운 겨울이 찾아오면 굶어야만 하는 베짱이의 운명과 같다. 그들에게 알맞은 직업이 없으니 말이다. 이와 같은 학자들의 운명은 어제나 오늘의 일이 아니고 아주 오래된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름 한 낯 해가 뜨거워지고 베짱이들이 시끄럽게 울어대기 시작하면, 소크라테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제자들에게 항상 베짱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에 의하면, 시신 뮤즈가 탄생하기 전까지는 학자나 음악가, 시인들은 모두 베짱이처럼 고기나 술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주피터는 이들을 모두 베짱이로 만들어버렸다고 한다.

         모두가 허망한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학자들의 운명은 가난하고 비참하다는 것이다. 항상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남에게 호소하여 부유한 후원자의 도움을 바라는 신세다. 그렇게 하다보니 몇 푼의 돈을 얻어 쓰기 위하여 비난을 하거나 욕을 해도 시원치 않을 아무런 덕이나 자격이 없는 폭군과 같은 후원자를 위하여 거짓말도 하여야만 하고, 없는 덕을 칭송하는 글도 써서 이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아첨도하여야만 한다. 결국 조그만 이익을 얻기 위하여 이들은 마치 거리의 악사나 돈을 받고 싸움터에 나서는 용병과도 같이, 힘있는 사람들의 심부름꾼이나 노리개가 되기도 한다. 이런 학자들은 황금을 산더미처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가치를 모르는 야만인과도 같다. 이들은 이미 최고의 교육기관에서 최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최고의 자격을 가지고 있으며, 최고의 명예도 갖춘 사람들이다. 우리 보통 사람들에게 이들은 찬사와 부러움의 대상이다. 대시인 호머가 없이 어찌 장군 아킬레스가 있겠는가? 역사가 커티우스와 아리안이 없다면 알렉산더 대왕의 족적을 우리가 어찌 알겠는가? 호라티우스의 다음과 같은 노래는 참으로 진리가 담겨져 있다:

아감멤논 장군 이전에도 수많은 맹장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을 노래하여 준 시인이 없었기에

울어주는 사람 하나 없이,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 깜깜한 어둠 속에 묻혀버렸네.

        역사상 유명한 사람들과 사건들은 참으로 학자들이나 시인들의 덕을 본 사람들이다. 학자들이 있기에 이들도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다. 학자들은 자기들이 만들어 낸 위대한 역사상 인물들의 무게에 눌려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빛도 보지 못한다. 학자가 백과사전을 통째로 그의 머리 속에 가지고 있고, 이 세상의 지식을 모두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오직 학자 개인만이 아는 일이며, 개인만이 혼자 기뻐하는 일이며, 개인만이 남몰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일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춥고 배고프기는 마찬가지다.  귀도 보나트라는 위대한 천문학자는 일찍이 자신의 처지를 간파하여 학자의 직업이란 곡간의 생쥐처럼 남이 먹고 남은 빵 부스러기나 먹고사는 신세다,라고 한탄하였다. 시인 부캐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자 의사와 변호사가 말을 타고 가는 옆에

가난한 학자 걸어간다.

        가난하면 떠오른 사람에 학자말고 시인이라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주피터는 자기의 딸들을 결혼시킬 때 다른 딸들에게는 모두 두둑한 지참금을 주면서도 시신() 뮤즈에게만은 지참금으로 가난을 주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올림피아 산에 살았던 시신들은 구혼자가 없어 모두들 독신이었다고 전한다. 그때부터 이 시신을 흠모하여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가난하고,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혼자 살게 되었다. 우선 이 시인이란 사람들은 외모만 보면 알 수 있다. 입은 옷만 보면 단번에 그 사람이 시를 써서 먹고사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언제 어디서고 간에 유달리 꾀죄죄한 옷을 걸친 사람이면 물어보지 않아도 십중팔구 그 사람은 부자들이 경멸하는 시인이다. 사실인지를 확인하기 위하여 얼마 전 어떤 모임에서 실제로 물어본 적이 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시인이라고 대답했다. 시인인 것은 좋은데 어째서 이렇게 남루한 옷을 입고 다니느냐고 묻는 김에 내처 물었다, 이 직업으로는 부자가 될 수 없답니다,라고 그는 정직하게 대답하였다. 페트로니우스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자:

 

바다로 나가 돈을 버는 상인의 이익은 크지요,

군인도 전쟁에 승리하면 금빛 찬란한 투구와 갑옷을 입지요,

부자의 기분을 맞춰주는 아첨꾼들 역시 화려한 옷을 얻어 입지요,

누더기 옷은 우리 시인들 차지.

        대학에서 문학이나 수학, 또는 철학 같은 순수 학문을 공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손해이고, 다른 사람들의 존경도 받지 못하고, 후원자도 얻기 힘들고, 어리석은 일인가를 일찌감치 알아차린 약삭빠른 학생들 가운데는 예술이나 역사, 철학이나 언어학과 같은 순수 학문들을 그저 식탁에서 식사하는 자리에 알맞은 유쾌한 장난감이나 이야기를 재미있게 꾸미는 장식품 정도로 옆으로 밀어놓고, 그 대신 법률, 의학, 그리고 신학과 같은 현실적이고도 수지맞는 학문을 공부하여 먼저 충분히 돈을 벌고 나중에 자기가 원하는 공부를 하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럴 필요는 없다. 돈이 있는 사람은 자기 돈을 계산할 줄 안다면 족하지 따로 수학을 공부할 필요는 없다. 자기가 소유한 토지의 크기를 아는 사람은 이미 지리 공부는 다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성공과 실패를 알고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보고 자신의 행동을 바로 할 줄 아는 사람은 이미 뛰어난 신학자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망원경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고 다른 위대한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과 성과에서 나오는 광휘를 자기에게 비출 줄 아는 사람이다. 좋은 일자리를 마련할 도구를 혼자서도 마련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훌륭한 기술자이다.

        요즈음 대학이라는 것은 그 질이 아주 낮다. 좋은 학생이 없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고 나서도 좋은 보수나 대접이 없으니 제대로 된 철학자, 수학자, 고전학자가 있을 리 없다. 그저 너나 나나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신학인데, 이것은 졸업 후 부유한 마을에 위치한 커다란 교회의 목사 자리가 탐이 나서 하는 짓이지 정작 신학 공부와는 거리가 멀다. 요사이 부모들은 자식들의 적성이나 능력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법률이나 신학을 공부시킨다. 진정한 학문의 탐구는 속세의 이익 앞에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모든 사람들의 눈에 먼저 뜨이는 것은 번쩍이는 황금이지 그리스어나 라틴어로 쓰여진 고리타분한 종이뭉치가 아니다. 이처럼 돈을 아는 사람들이, 돈을 가진 사람들이, 나라를 차지하여 다스리고 있으며, 왕 앞에서 이런 말 저런 말로써 왕의 귀를 즐겁게 한다.

        반면, 학자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더위에 헐떡이면서, 억울한 운명을 감수하고 이런 사람들을 섬기면서, 이들이 주는 쥐꼬리만한 돈을 받아 연명하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비록 이들의 생활이 결코 가치 없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이들은 가난한 시골구석이나 대학의 한 구석에 파묻혀 일생동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난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이름도 없이, 소박하게, 겸손하게, 조용히, 그리고 가난하게. 이제부터 나는 더 이상 이 학자들에 대한 슬픈 이야기는 하지 않으련다. 눈물이여, 이제 그만 가거라. 시신들이 상복을 입고 있다고 더 이상 눈물을 흘릴 이유는 없다. 교회도 이제는 조소와 경멸의 대상이며, 성직도 이제는 성직이 아니다.

 

 

icon_con.gif

인간의  행운과 불운에 대하여 (본문 가운데서)

        우리의 마음을 괴롭히는 불만과 불평에는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일반적인 것과 어느 한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특별한 것이 있다. 전자에 해당하는 것에는 전쟁의 발발이나 전염병의 창궐, 오래 계속된 가뭄에 따른 대 기근과, 기후의 대 변화, 대 홍수, 대 화재 등으로써 나라나 도시 전체를 재난으로 몰아넣는 것이며, 후자는 어느 개인에게만 특별히 찾아오는 근심과 걱정, 배반, 손해와 손실, 친구의 죽음, 가난, 부족, 질병, 자손의 없음, 부상, 불명예, 치욕 등이 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세상에 불만이 없는 사람은 없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운명이라는 파도 위에 떠 있는 존재다. 어떤 경우도 공짜인 경우는 없다.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운명을 견디어내야만 한다. 기쁨과 환락 속에도 불만과 불평이 들어있다. 우리의 삶은 쓴맛과 단맛, 꿀과 담즙의 혼합물이다. 어차피 우리 인간의 운명이 이럴진대 화내고 한탄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 당신 혼자서 겪는 고통과 불행이 아닐진대 남보다 더 안달한다거나 속을 태울 이유도 없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는 분명 다른 사람보다 좀더 불운하고 불행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경우는 어쩌란 말인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사사로운 불행과 고통 이외에 우리는 누구나 다음과 같은 공동의 적 앞에서 끊임없는 공포심과 위험 속에서 살고 있다. 혼인을 축하하는 축혼가를 듣는 한편, 전쟁의 여신인 벨로나의 채찍을 맞고 아파하는 구슬픈 비명을 들어야 하며, 유쾌하고 부드러운 음악이 있는 곳에서 전쟁을 알리는 무시무시한 총소리, 북소리, 그리고 나팔 소리를 들어야만 하고, 결혼식을 축하하는 횃불이 있는가 하면, 전쟁이나 기타 다른 재난으로 우리 마을이나 도시 전체가 거대한 횃불로 변하기도 한다. 개선축하식이 있기 위하여서는 참혹한 희생이 선행하며, 즐거워 웃음소리가 요란한 곳에는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이 엄연한 사실을 보거나 듣기를 거절한다거나, 거기에 따른 고통을 겪고 참아내기를 거절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 알맞은 사람이 아니며, 공통된 인간의 조건을 모르는 사람이며, 우리의 인생이 슬픔과 즐거움이 동시에 섞여있는 것이며, 즐거움과 슬픔이 번갈아 찾아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것이 어차피 있는 일이고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어째서 우리는 그 일 때문에 속 썩이고 마음의 고통을 겪어야만 하겠는가? 키케로의 말과 같이, 이 세상에 불가피한 것은 결코 크게 고통스러울 수 없다. 그러니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하자. 그대가 원할 수도 없고 원하지 않을 수도 없을 때는 참고 견디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 고통이 오래 계속되는 것일 때는 그 고통은 아마도 가벼운 것일 것이다. 그 고통이 크고 심각할 경우에는 아마도 그 고통은 오래가지 않고 곧 끝나거나 자나가 버릴 것이다. 고통과 고민은 지나가게 마련이며, 그렇지 않더라도 시간이 그것의 예민한 모서리를 뭉개버려 무디게 만들어줄 것이다. 고통도 일단 익숙해지면 그 아픔이 덜하다. 익숙해진 습관이 고통을 완화시켜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손실과 손해, 상처와 슬픔, 그리고 기타 모든 근심과 걱정을 치료하여주는 만병통치약에 망각이란 이름의 약이 있다. 
         
        그리고 일단 하나의 큰 불행이나 불운이 지나가고 나면 이 불행에서 다른 곳에서는 얻기 어려운 아주 진귀한 재물을 얻게된다. 그것은 앞으로의 우리의 삶이 더 값지고 달콤해진다는 사실이다. 언젠가는 우리는 이 고통스런 기억을 하며 즐거워할 것이다. 가난과 결핍은 풍요 속에서 바라보면 몇 배 즐거운 법이다. 지나간 고통을 행복 속에서 바라볼 때도 같다. 그러니 현재 가장 행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어떤 불행과 불운에서 면제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태양과 달 아래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시간과 더불어 쇠퇴하고 변화한다. 이 지구라는 땅 위에 사는 당신도 예외는 아니다. 예외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예외를 바라서도 안 된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이 땅 위에서 평화롭고, 기쁘고, 조용한 나날을 보내며 살겠다는 커다란 기대보다는 검은 먹구름과 폭풍우, 그리고 각종 중상과 모략, 그리고 비방을 들으면서 살기를 기대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일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의 공통된 운명이다.

        그러나 당신의 생각에 당신은 분명 어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불행하고 불운한 것이 사실이다. 당신에 비하여 어떤 사람은 분명 더 행복하다. 당신이 겪는 고통에 비하여 그 사람이 겪는 고통이란 것은 벼룩에 물려 가려워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만이 불행하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당신처럼 심한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 치고 소크라테스가 질문한 바와 같이, 만약에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의 심신의 불행과 불만, 고통을 가지고 한 장소에 모여 - 소화불량, 생인손, 광증, 지랄병, 문둥병, 오한, 가난, 구걸신세, 노예신분, 감옥에 감금, 사업실패, 빚, 등 - 이 모든 것들을 한곳에 쌓아놓은 후 공평하게 분배를 하였을 때, 과연 당신은 그 중 한 몫을 아무런 주저 없이 가져가겠는가? 아니면 현재의 당신으로(불행한 대로) 남아있겠는가? 대답은 자명하다. 후자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불행이나 모자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이 겪는 불행이나 부족에 대하여서는 모른다.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의 불행에 대하여서만 생각하지 남의 불행에 대하여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 본성이다. 자기의 불행에 대하여서는 누누이 이야기하면서도 자기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장점, 좋은 점, 타고난 재주, 주어진 재산에 대하여는 잊고 있다. 자기가 처한 어려움에 대하여서는 길게 늘어놓으면서도 자기가 현재 누리고 있는 복이나 재산, 행운에 대하여서는 감사할 줄을 모른다.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몇몇의 불운에 정신이 팔려 앞으로 따라올 무한정한 행운은 보지 못한다. 이 세상에는 당신이 현재 불만스럽게 가지고 있는 재산,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처지, 불만스럽게 여기고 있는 운명의 지극히 적은 일부분만 주어진다 하여도, 자기는 천국에 가 있다고 생각할 사람, 자기는 지금 당장 어느 왕국의 제왕이 되었다고 생각할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지금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쌍한 사람들이, 노예들이, 죄수들이, 전쟁포로들이, 단지 그 목숨을 연장하기 위하여, 그 가난한 삶을 유지하기 위하여, 땅 속 깊이 파 들어간 지하 갱도 속에서 석탄이나 주석을 파내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았는가? 모르면 몰라도 나의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현재 자신의 운명에 불평과 불만이 있는 사람들은, 이들의 하고 있는 힘든 노동과, 이들의 몸과 마음이 겪고있는 극도의 고통과 고뇌로부터 해방되어있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당신의 행복을 인정하라.

        그러니 입 다물고 조용 하라. 만족하라. 당신보다 몇 배나 더 불행한 다른 사람들도 말없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이솝우화에서 두더지는 꼬리가 짤려 나간 여우의 불평을 듣고 다음과 같이 충고하였다, 너는 지금 장난감이 없다고 불평하고 있구나. 나를 봐. 나는 장님이란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스스로를 위로하라. 겁 많은 토끼의 이야기도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겁이 많아 항상 놀라고 두려움 속에 살고있는 토끼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여 모두들 함께 물에 빠져 자살하기로 결정하고 연못으로 갔다. 그 곳에 살고있던 개구리들이 토끼들이 몰려오자 모두들 혼비백산하여 연못 속으로 도망을 갔다. 생후 처음 자기들을 보고 무서워 도망가는 개구리들이 있다는 사실에 크게 고무되고 용기를 갖게된 토끼들은 모두 마음을 고쳐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주어진 것에 항상 하느님에게 감사하라. 신이 그대를 뱀이나 두더지, 지네, 괴물이나 짐승, 또는 어떤 비천한 생물로 만들어놓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도 당신이 신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릴 이유가 충분하다. 신은 당신을 한 마리의 개미나 개구리, 아니면 벌레로 만들어 놓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비로운 신은 당신을 사람으로 만드셨다. 이 사실 하나만 잘 생각해 보아도 당신은 현재의 당신의 처지에 크게 만족하고 감사할 것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자기가 바라는 것을 모두 가질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이 갖지 못한 것을 갖기를 바랄 것인가 아닌가를 선택할 수 있다. 당신의 운명은 정해졌다. 그 정해진 것을 최대한 사용하라.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잠이 들어 깨어나지 안는다면 이 세상에는 행복한 사람도 없고 불행한 사람도 없다. 우리의 일생은 짧은 한나절의 꿈이다. 우리가 우리의 주변을 한번 둘러보는 동안 이 세상의 삶은 끝나고 영원의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사람의 일생은 하나의 순례여행이다. 현명한 사람은 이 여행을 민첩하게 끝낸다. 그대가 만약에 근심과 걱정, 슬픔, 고통, 질병 속에 있거든 신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라는 선지자의 말을 기억하라. 눈물 속에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 속에서 수확하리라,고 시편에 기록되어 있다. 금광석이 용광로 속에서 녹아야 순금이 되듯이, 우리 인간도 역경을 통하여 단단해지고  고귀해진다. 고통과 역경은 우리를 살찌게 한다. 성서에도 있듯이, 곡식은 도리깨질을 통해서 낱알을 얻을 수 있듯이, 사람은 고통을 겪어야만 세속적인 고민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심신의 아픔은 곧 교육이다. 선원은 폭풍우를 통해서 일류 항해사가 될 수 있고, 육상 선수는 큰 대회에 나가 보아야 큰 선수가 될 수 있고, 군인은  전투에 참가해보아야만 능력 있는 지휘관이 될 수 있듯이, 사람은 누구나 역경을 통해서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싸움터에 내보내진 전사다. 우리는 이 세상의 고통과 싸워야만 하고, 우리의 심신과 싸워야만 하고, 이 세상의 악과 싸워야만 한다. 우리의 삶은 싸움이다. 누가 그것을 모른단 말인가? 그런데 그것이 천국으로 가는 싸움이란 사실을 잊고있는 사람은 많이 있다. 이 땅으로부터 천국으로 가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성자 그레고리의 말처럼, 그런 이유로 이 땅 위에서의 우리의 삶은 고통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는 길이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을 때, 우리는 그 여행이 기쁘거나 즐거울 수 없다.

        그러니 기쁜 마음으로 천국으로 가는 여행을 하자. 비록 그 길이 험난하고 당신은 피로와 고통 속에 외롭고 괴로워도, 잘 살펴보면 길 주변에는 유쾌한 놀이들과 향기로운 꽃들, 맛있는 음식들과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도 있어 당신의 기분을 달래주고 용기를 북돋아 줄 것이다. 혹시라도 그대가 세상의 버림을 받아 비난과 경멸, 조소의 대상이 되어 실의와 실망 속에서 울고있는 신세가 되었다 하더라도 보에티우스가 황야에 홀로 버려져 울고있던 하가르를 위로한 다음과 같은 말을 가지고 스스로 위안을 찾도록 하라, "신은 너를 보고 계시니라. 너의 어려움도 눈여겨 보고계시니라. 당신의 머리 위에는 항상 당신을 구원하여 그대의 정당함을 밝혀줄 신이 있다. 그러니 안심하고, 기뻐하고, 만족하라."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쉬운 일, 조그만 일부터 시작하자. 우리의 선배들이 남겨놓은 좋은 말, 유익한 충고, 필요한 가르침부터 기억하여 실행에 옮기도록 하자. 너 자신을 먼저 알라

 

※ 책소개 바로가기 :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535572

댓글목록

profile_image

김미경님의 댓글

김미경 작성일

이 책은 아예 배게 옆에 두고 잡니다.
자다가 문득 일어나서 별달리 할일이 없을 때도 읽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지는 대로 읽다가 자기도 하구요.
그러다보니 읽은 부분을 또 읽게 되는데, 몇번을 읽어도 좋더군요. 보통 번역본은 매끄럽지 못한 번역 때문에 글읽기의 흐름에 방해받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책은 탁월한 번역 때문에 더욱 내용에 몰입하게 됩니다.
번역이란 이런 것이다~ 에 대한 best sample이라해도 좋을듯...    2006-08-29 19:42:07

profile_image

이창국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국 작성일

김미경 선생;

과찬의 말씀에 부끄럽습니다. 번역에는 완성이 없으니,
더 좋은 번역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2006-09-19 22:55:34

회원로그인

회원가입

설문조사

결과보기

새로운 홈-페이지에 대한 평가 !!??


사이트 정보

LEEWELL.COM
서울특별시 강남구 대치동 123-45
02-123-4567
[email protected]
개인정보관리책임자 : 김인배
오늘
471
어제
512
최대
5,592
전체
1,104,741
Copyright © '2021 LEEWELL.COM All rights reserved.   Designed by  IN-B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