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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TERARY WORKS


어느 무명 화가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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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어떤 잘 알려진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는 항상 그 작품의 제목과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의 이름을 기억한다. 〈모나 리자〉하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이삭 줍는 사람들〉이나 〈저녁 기도〉하면 밀레라는 프랑스 화가의 이름을 연상하며, 〈생각하는 사람〉이란 조각품 앞에서는 로댕이란 조각가를 상기한다. 문학이나 음악, 기타 다른 예술에서도 마찬가지다. 〈돈키호테〉하면 세르반테스라는 스페인 소설가, 오페라 〈라 보엠〉은 푸치니라는 이탈리아 작곡가의 이름이 따라나온다. 두 가지를 다 기억하지 못할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고, 이 중 하나만이라도 생각이 나지 않을 경우에 우리는 약간 당황하거나 불안해한다. 이처럼 유명한 작품의 제목과 작가의 이름은 그 예술품의 가치를 높이고 감상을 돕는데 있어서 필수불사결이라고까지는 아니더라도 상호보완작용을 함에는 틀림 없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 두 가지를 모두 기억한다는 것은 이런 방면의 일을 필요에 의하여 또는 직업적으로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일일이 기억할 수도 없고, 설사 기억했다 하더라도 시간의 경과와 함께 잊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주에 있는 〈석굴암〉이나 파리 루부르 박물관의 사모트라케의〈승리의 여신상〉, 밀로의 〈비너스〉처럼 작가의 이름은 아예 처음부터 없고 작품의 제목도 후세 사람들이 편리한대로 붙여놓은 위대한 예술품도 허다하다. 다행스런 일은 이런 이름이나 제목과는 관계없이 예술작품은 존재한다는 사실이며, 실제에 있어서 우리 보통 사람들은 작품의 제목이나 작가의 이름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큰 어려움이나 불편 없이 얼마든지 좋은 예술품을 즐기고 감상할 수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작품 자체이지 작품의 제목이나 작가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의 방에는 풍경화 두 개가 걸려있다. 수채화 같기도 하고 유화 같기도 한데, 아무래도 유화인 듯 하다. 가로 40cm, 세로 30cm 정도의 이 그림 두 개는 사용된 색채나 화법으로 보아 한 사람의 작품임이 분명하다. 물론 제목도 모르고 화가의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소위 무명화가의 그림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이 그림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는 동안 돈을 주고 산 유일한 그림이며, 나와 함께 살아 온지가 어언 30년이 넘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대여섯 번 이사를 했으며, 그때마다 나는 적지 않은 물건들을 내다버려야만 했었는데 이 그림 두 개는 항상 살아남았다. 이제 정년퇴직을 일년 앞두고 나는 나의 일생 마지막 이사를 한달 앞두고 있다. 현재 나의 사무실과 나의 집에서는 그 동안 생겨난 가구들, 기념품들, 책자들, 그리고 벽걸이용 장식품들이 적지 않은 분량이며, 이들 사이에서는 서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소리 없이 진행중이다. 대부분이 탈락의 위기에 처하여있다. 그러나 이 그림 두 개는 이미 경쟁을 끝낸 상태다. 이들은 나의 이삿짐 목록에 포함될 것이 확실하며,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한 나와 함께 있을 것이 분명하다.

     내가 미국 펜실바니아 주에 있는 빌라노바 대학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던 1972년, 가을, 어느 날, 나는 당시 고등학교에 다니던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의 아들 죤을 따라 소위 “거라지 세일”이라는 곳에 처음 간 일이 있었다. 이웃에 살던 사람이 이사를 가면서 그간 쓰던 물건들을 아주 헐값에 팔아 넘기기 위한 세일이었다. 생후 처음 미국사람들의 살림살이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속속들이 들여다 본다는 것은 별난 경험이었다. 그 집 앞마당에 펼쳐놓은 잡다한 물건들은 모두가 쓰던 물건이었고, 붙어있는 가격들은 거저 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싼값이었으나 가난했던 당시 나의 눈에는 모두 탐나는 물건들이었다. 돈만 있으면 몽땅 사서 집으로 보내고 싶었다. 나는 집에 두고 온 어린 딸들을 위하여 인형과 장난감 몇 개, 그리고 그림책 몇 권을 골랐다.

     구경을 마치고 돌아가려는 순간 나의 시선이 우연히도 한구석에 포개어 놓여있는 두 개의 그림 위에 머물렀다. 이 그림은 1cm 정도 두께의 코르크 비슷한 나무판 위에 부착되어 있었으며, 투명한 비닐로 덮여 있었다. 그림 뒷면 중앙 상단에는 못에 걸도록 조그만 구멍이 얇게 패어있었다. 들어올렸을 때 그 무게가 너무나 가볍다고 느껴졌다. 가격표를 보니 1 달러, 2 달러를 주고 두 개를 모두 샀다. 화가의 이름이나 제목 같은 것은 물론 알 바 아니었다.

     지금처럼 도로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있지 않았다는 점, 어디에도 자동차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고 하겠지만 이 두 그림에 그려진 집들의 모습과 거리 풍경은 미국이 지금처럼 부자도 아니었고, 기계문명으로 번잡하지도 않았고, 대부분의 일이 기계가 아니고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지던 때의 전형적인 한가롭고 평화스런 시골마을 모습이다. 한 그림에는 농부가 허름한 창고 옆에 놓여있는 마차를 향해 천천히 말을 끌고 가는 모습이 보이고, 마을을 가로질러  흐르는 개울 위로는 집같이 지붕이 있는 다리도 있다. 비슷한 배경의 다른 그림에서는 부부인 듯 보이는 나이든 남자와 여자가 오래된 둥근 탁자를 서로 부축하여 어떤 건물 안으로 옮기는 다정한 모습도 보인다. 수선이 필요한 모양이다.  

     이 두 그림은 하나같이 사용된 색채가 밝고 화려하다. 주로 노란 색과 붉은 색의 이상적인 배합과 조화, 그리고 여기에 곁들여진 고동색과 검은 색이 만들어 보여주는 전형적인 미국의 조용하고 평화스런 시골 작은 마을 풍경은 한껏 무르익은 가을의 정취를 강렬하게 느끼게 만든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길 양쪽에 늘어선 오래 묵은 웅장한 나무들은 단풍으로 물들어 불타는 듯하며, 낙엽으로 뒤덮인 도로 위로 긴 그림자들을 드리우고 있다.

     나는 이 그림을 거의 매일 같이 바라보면서 이것이 위대한 작품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세상에 1 달러 짜리 위대한 그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나는 처음 그 그림을 보았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변함없이 이 그림이 가져오는 평온함을 사랑한다. 그리고 이 그림은 내가 희망과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던 젊은 시절을, 한 때 경험한 미국생활을, 그리고 미국 펜실바니아 주 버윈, 버윈 아베뉴 700 번지의 그 집과 그 동네, 나를 한 가족처럼 대해주었던 주인 아주머니 버지니아 페이어스 여사, 그의 딸 데보라, 아들 죤의 얼굴을 떠오르게 한다. 모두들 어찌 되었는지 이제는 알 길이 없다.

     시간이 삼십여 년이 넘게 흐르다보니 지금까지 이 그림을 덮고있는 비닐이 낡아서 모서리 부분부터 차츰 찢어지기 시작한 것을 나는 최근에 발견하고는 어떤 조치를 취하여야만 되겠다는 생각에 그림을 벽에서 떼어내어 처음으로 자세히 그림 앞뒤를 뜯어보았다. 그림 왼쪽 하단에 조그맣게 쓰여진 G. Cherepor(지. 체리포)라는 화가의 이름도 새롭게 확인하였다. 그림 뒤에는 지금까지 무심히 지나쳐버린 상표도 하나 붙어있었다. 여기에 적혀있는 문구들을 종합하여 판단하여 보았을 때 이 그림은 어떤 전람회에 출품하여 상을 받은 작품들 가운데 하나가 분명하다. 이런 상품을 제조하여 판매하는 어떤 회사가 이 화가 작품의 사용권을 얻어 필요한 만큼 복사품을 만들어 나처럼 가난하지만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싼값으로 살 수 있도록 대량으로 보급한 것이 분명하였다.

     며칠 전 나는 이 그림 두 개를 내가 잘 아는 표구상에 가지고 가 거금을 들여 이 그림에 알맞은 액자를 주문하였다. 비닐 포장을 걷어내고 유리를 끼웠다. 벽에 걸기 위한 장치도 새로 달았다. 이제부터는 이 그림을 못의 머리에 정확하게 끼우기 위하여 고생하는 일은 없어졌다. 우아한 액자 속에 넣고 보니 같은 그림이지만 훨씬 더 고상해 보이고 품위가 높아 보였다. 진작 이렇게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였다.

     오늘 아침 나는 이 그림을 바라보면서 이처럼 오랜 세월 나와 함께 있으면서 나를 기쁘게 하여준 이 그림을 그린 화가에 대하여 - 무명 화가에 대하여 - 이런 저런 감상적인 생각을 해 보았다. 이 화가는 지금쯤은 죽었음이 틀림없다. 여자였을까, 남자였을까? 여자였든 남자였든 이 화가는 이 그림을 그려 전시회에서 상을 받은 후 어찌되었을까?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그 후 계속 작품활동을 하여 내가 모르고있는 사이 생전에 꽤나 유명해졌으며, 화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행복한 일생을 마치었는지? 아니면 이 세상에 남다른 재능을 타고난 수많은 예술가들의 운명이 그러하듯이 이 사람도 화가로서의 그 크고 높은 열망을 이루지 못하고 어느 시골에서, 혹은 어느 도시 한구석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죽었는지? 비참한 일생을 마치지나 않았는지? 나는 혹시나 해서 이 사람의 이름을 컴퓨터에 넣어 이런 저런 방법으로 조사를 해 보았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하였다. 나는 이 화가에게 다른 것은 몰라도 그가 그린 그림들 가운데 두 개가 우연히도 가난했던 한국 유학생의 손에 들어와, 태평양을 건너 한국까지 와서, 그의 고향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만리타향에서 이처럼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있다는 사실을 알려줄 길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2005.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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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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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재욱님의 댓글

추재욱 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교수님, 화가의 이름이 G. Cherepor가 아니라 Cherepov이네요. 리투아니아 태생 미국화가(1909-1987)이구요. 이 사이트 http://www.askart.com/AskART/artists/bulletin.aspx?searchtype=DISCUSS&artist=103245 에 가시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Cherepor로 Google싸이트에서 검색을 해보니 교수님 Korea Times 에세이가 뜹니다. 그리고 이름 끝이 'v'인지를 물어보네요. 그리고 그 화가의 작품을 여러사람들이 소장하고 작품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있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교수님.

ps) 아래 링크 싸이트에 들어가시면 그 화가의 자세한 이력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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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graphy from AskART:http://www.askart.com/AskART/C/george_cherepov/george_cherepov.aspx?searchtype=SUMMARY&artist=10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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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국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고마워요, 추재욱 선생. 어째서 내가 v를 r로 읽을려고 고집했을까?
참으로 어이없고 신기한 일이네. 글을 하나 새로 써야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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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ha님의 댓글

no_profile Martha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I, too, have a painting by G. Cheropor. It has a red barn, with a farmer in overalls leading a horse to the barn. It has a wagon on theleft of the picture and a white fence around the barn. My father died a few years ago and this painting hung in his house. I would like to find out more about this artist but don't know where else to look. Did you have any luck finding about yours? Thanks a lot.    - Martha Laws, Orlando, Florida.

(나 역시 이 G. 체리포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을 한 폭 가지고 있어요. 그림 안에는 붉은 샛갈의 농장이 보이고, 전통적인 농부의 복장을 한 농부가 말을 끌고 농장으로 걸어가고 있어요. 농장 안에는 그림 웬쪽으로 마차가 놓여있으며, 농장 주변에는 흰 색갈의 울타리도 둘러있어요. 나의 아버지가 몇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이 그림은 아버지 집에 걸려있었어요. 이 그림을 그린 화가에 대하여 좀 더 알고 싶은데 방법이 없군요. 혹시 선생님은 더 알고 계신것이라도 있으신지요. 감사합니다.
플로리다 주 오랜도에서, 마사 로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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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국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마사 로우 여사에게;
이 세상에 나 이외에 이 지 체리포라는 화가의 그림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한 사람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참으로 놀랍고도 즐겁습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다는 그림은 내가 가지고 있는 두개의 그림 가운데 하나와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불행한 일은 저도 이 화가에 대하여 내가 "어느 무명 화가를 생각하며" 라는 글에서 쓴 것 이외에 더 알고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궁금한 일은 어떻게 당신이 나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느냐하는 것입니다. 내 추측으로는 내가 이 화가와 화가가 그린 그림에 대하여 몇년 전에 코리아 타임스에 있는 나의 칼럼에 발표한 글을 우연히 접하였을 것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고, 그곳은 미국이고,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는군요.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서울에서, 이창국.

(Dear Martha; I am very surprised and delighted to learn that there is at least one more person who owns G.Cheropor's painting in the world. One of the two paintings I have matches exactly with yours, according to your description.
It is very kind of you to let me know of this very interesting fact. I feel very much thrilled. But very unfortunately, however, I have not succeeded yet in finding out more information about the artist than I wrote in my essay "To an Unsung Artist." How I wish I could.
By the way, I am very curious how your message about this painter has come to me. I presume that you may have read my essay about this painter and his paintings, but it was long ago already, and you are now living in the United States. Could you let me know?
Thanks a lot, anyway. Lee Chang-kook, Seou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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