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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과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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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과 번역 (금아 피천득 추모 5주기 기념 학술대회 발표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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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문단에서 시인이자 수필가로서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피천득은 번역에 있어서도 그분 특유의 독보적인 업적과 자취를 남겼다. 혹자는 그 분이 번역도 하였느냐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그가 남긴 번역의 양이 그리 많지 않은 반면, 수필가로서 시인으로서의 명성이 워낙 높기 때문이다. 그의 번역은 수필과 시의 명성에 파묻혀 지금까지 거기에 알맞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피천득이 스스로 자신의 이력에 내세운 번역은『셰익스피어 소네트 詩集』과 『내가 사랑하는 詩』 두 권뿐이다. 이외에 산문 번역으로 Charles Lamb과 Mary Lamb 자매의 공저인 Tales from Shakespeare를 번역한 『셰익스피어 이야기들』이 있고, Nathaniel Hawthorne의 단편소설  “The Great Stone Face"를 번역한 “큰 바위 얼굴” (현재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음) 등 산문 번역도 있으나 이것들은 현재 그의 이력에서 낙루되어 있다. 여하간 이 모두를 합쳐보아도 분량으로 말하자면 우리나라에서 번역에 종사하여 이름을 얻은 다른 분들의 업적에 비하면 턱없이 빈약하다고 말할 수 있다.

     피천득은 시도 쓰고 수필도 써 높은 명성을 얻었지만 직업은 영어를 전공한 영문학 교수였다. 그가 읽고 가르친 영문학 작품들 가운데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우리말로 번역하였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일이다. 그는 그이답게 번역의 대상으로 그가 정말로 사랑하고 좋아하는 작품만을 골랐다. 셰익스피어였다. 그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보여준 찬사와 경탄은 참으로 대단하다. 그는 “셰익스피어”란 제목으로 한편의 수필을 썼을 정도이며, 그의『내가 사랑하는 詩』서문에서 “다른 그 어떤 이유도 아닌, 오직 셰익스피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영어는 익혀둘만한 언어다”라는 어느 서양 비평가의 구절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그는 그이답게 그 수많은 영문학 작품들 가운데서 작지만 하나하나가 보석처럼 빛나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번역에 손을 대었다.

     외국어를 남보다 많이 습득하여 해당 외국어에 어느 정도 정통하게 된 사람에게 있어서 번역은 하나의 도전이요, 유혹이다. 동시에 해당 외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문화적 문학적 봉사활동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로 번역을 하게 된 사람의 입장에서는 시간과 정력이 무진장으로 소요되는 중노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작에 따르는 명예도 결과적으로 보면 그리 큰 것이 되지 못한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한때 우리나라에서 번역은 대학교수의 전속 부업일 때가 있었다. 피천득도 이 시기에 속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해당 외국어를 우리말로 번역할만한 실력을 갖춘 사람이 주로 그들이었고, 이 번역의 일은 고된 작업이긴 하면서도 번역자에게 나름대로의 명예와 용돈도 가져다주는 유일한 부업이었다. 출판사에서도 대학교수에게 이 일을 의뢰하기가 일수였고, 대학교수들도 이일을 스스로 찾아 나서기도 했다. 번역의 대상이 되는 작품은 출판사의 입장에서 보면 잘 팔릴 가능성이 있는 잘 알려진, 유명한 작가의 소설이 대부분이었다. 유명한 문학상을 받았다거나, 소위 베스트셀러 소설이 대상이었다.

     이런 이상과 현실이 상충하는 번역이라는 분야에 있어서도 피천득은 여러모로 우리의 귀감이 되고 있다. 그는 번역에 있어서도 유행에 흔들리지 않았고 헛된 욕심이나 명예를 추구하지도 않았다. 그는 꼭 자기에게 알맞은 대상을 골라 자기방식대로 번역도 하였다. 그로 하여금 번역을 하도록 만드는 원동력은 작품에 대한 각별한 사랑과 그것을 우리말로 옮겨보는 즐거움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번역은 시나 수필을 쓰는 일과 결국은 같은 일이다. 다시 말해서 좋은 글, 아름다운 글을 쓰는 일이다. 그는 번역의 어려움과 한계도 누구보다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내가 사랑하는 詩』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왜 외국의 시를 번역했는지 궁금해 할 독자들이 있을 것 같아서 말하는데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외국의 시를 보다 많은 우리나라의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시를 번역하면서 가장 염두에 두었던 것은 시인이 시에 담아둔 본래의 의미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마치 우리나라 시를 읽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느낌이 드는 번역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다른 나라 말로 쓰인 시를 완전하게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시에는 그 나라 언어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감성과 정서가 담겨 때문입니다. 외국어에 능통하여 외국의 시를 원문 그대로 감상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수 있는 독자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쉽고 재미있게 번역을 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우리는 흔히 “번역은 예술이다,” 또 “번역은 제2의 창작이다,” 라는 말을 자주 하고 듣는다. 번역의 이상(理想)을 제시한 말이기도 하고, 번역의 어려움을 지적한 말이기도 하다. 또 번역은 아무나 달려들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아무리 해당 외국어를 오래 열심히 공부하여 어학적인 능력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문학적 소양이나 문학적 표현능력을 가추지 못하였을 때는 불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너무나 이상적인 말로써 현실은 여기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피천득은 예외다. 그는 시인이요 수필가다. 여기에 영어라는 언어를 전공한 영문학 교수다. 어찌 보면 그분이야말로 영문학 작품을 우리말로 번역을 할 사람가운데 가장 이상형이다. 그가 영문학 작품들 가운데서 셰익스피어, 그것도 시, 그 가운데서도 형식과 기교가 가장 정교하게 구성된 소네트를, 그것도 154편 전부를 한편도 빼놓지 않고 번역하였다는 사실은 생전에 힘든 일, 무모한 일, 무리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람임을 잘 알고 있는 필자로서는 참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는 이 어려운 일을 소리 없이 해냈고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업적에 대하여 자랑한다거나 자화자찬 한마디 없었다는 사실 - 모두가 우리 후학들로서는 본받고도 남을 일이다.

     피천득은 이 셰익스피어 소네트를 번역함에 있어서 “번역은 예술이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다”라는 번역문학의 이상을 말없이 실현하였다. 우선 그는 소네트 한편 한편의 뜻(내용)을 해석하고 전달함에 있어서 정확하고 동시에 자연스럽다. 번역된 시를 읽어보면 곧 알 수 있다. 영어를 전공한 사람들도 (원어민을 포함하여)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읽기 시작하면 곧바로 어려움에 봉착한다. 어학적으로 너무나 복잡하고 난해한 구문과 난해한 비유, 당대의 사람들만 알고 있음직한 에피소드나 토픽 - 한마디로 어려운 부분이 너무 많다. 억지로 해석은 해보지만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는 것 하나 자명한 것이 없다. 그런데 피천득은 자신만만하게 154편 전부를 번역한 것이다. 그것도 아주 명쾌하게.

     우리는 흔히 번역문이 애매할 때 원문으로 돌아가 해답을 얻는다. 피천득의 경우는 반대다. 피천득의 소네트 번역에는 애매한 부분이 없다.  원문이 애매할 때는 피천득의 번역문과 대조해 보면 뜻이 자명해 진다. 그 번역이 너무나 분명하고, 자연스럽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때로는 원시보다 번역이 더 좋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필자의 말이 의심이 가면 당장 그가 번역한 소네트 가운데서 하나를 골라 원문과 대조하여 읽어보면 된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그가 번역한 소네트 1번을 보자:  

     From fairest creatures we desire increase,
     That thereby beauty's rose might never die,
     But as the riper should by time decease,
     His tender heir might bear his memory;
     But thou, contracted to thine own bright eyes,
     Feed'st thy light's flame with self-substantial fuel,
     Making a famine where abundance lies,
     Thyself thy foe, to thy sweet self too cruel.
     Thou that art now the world's fresh ornament
     And only herald to the gaudy spring,
     Within thine own bud buriest thy content
     And, tender churl, mak'st waste in niggarding.
        Pity the world, or else this glutton be,
        To eat the world's due, by the grave and thee.

     이 소네트의 피천득 번역은 이렇다:

     가장 아름다운 사람에게서 번식을 바람은
     미(美)의 장미를 죽이지 않게 하려 함이라.
     세월이 가면 장년(壯年)은 죽나니,
     고운 자손이 그의 모습을 계승할지라.
     그러나 그대는 자신의 찬란한 눈과 약혼하여,
     자신을 연료로 태워 그 불꽃을 불붙게 하고 있도다.
     풍요가 있는 곳에 기근(饑饉)을 만들고,
     적(敵)인 양 자신에게 너무도 가혹하여라.
     이 세상의 싱싱한 장식품이요,
     찬란한 봄의 유일한 전령(傳令)인 그대는,
     가진 전부를 자신의 꽃봉오리 속에 묻어버리고,
     아낀다는 그것이 낭비를 함이로다. 아, 마음 고운 인색한이여.
         세상을 동정하라, 안하려거든 걸귀가 되어,
         모든 것을 무덤과 함께 먹어버려라.

     위에 제시한 한편의 소네트 번역에서 알 수 있듯이 피천득은 그 내용의 전달에 있어서만이 아니고 그 형식의 유지에도 각별한 배려를 하고 있다. 소네트의 시각적 효과와 음악적 효과를 최대한 살리고 있다. 영어 원문의 14행을 번역시에서도 똑같이 14행으로 유지하고 있음은 물론, 각행의 리듬과 길이도 최대한 살리고 있다. 이런 의도와 노력, 그리고 정성이 한두 편 번역에 경주된 것이 아니고 154편 모두에 하나같이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범인이 할 일이 아니다. 스스로 선택한 고난의 길이다. 어찌 보면 이 번역을 함에 있어서 피천득은 단순히 셰익스피어가 쓴 소네트를 충실하게 우리말로 옮기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우리말을 가지고 번역을 통하여 셰익스피어에게 어떤 도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착각이 아니다. 실제로 피천득은 셰익스피어에 도전하였다. 그는 셰익스피어가 쓴 소네트 154편 모두를 번역함에 그친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가 (시범적으로 이들 가운데서 6편을 골라 ) 이 14행의 정형시를 우리나라 엇시조의 형식을 따 4행으로 축소 번역 하는 전대미문의 곡예를 시도하였다. 도대체 어떤 동기와 목적에서, 어떤 자신감과 무슨 배짱으로 감히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자기 비위에 맞게 축소 단축하였단 말인가? 번역자로서는 원문을 충실하게 번역하는 것만도 벅찬 일인데 어찌 감히 피천득은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가지고 이런 장난(?)을 하였단 말인가? 동서고금에 없는 일이다. 누구도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해답은 간단하다. 피천득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 소네트 형식에서 허점을 발견하였고 불만도 느낀 것이다. 어쩌면 자기라면 더 잘 쓸 수도 있다는 자신감을 (우월감을) 느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솔직히 말해서 대부분의 소네트는 14행이라는 고정된 틀에다 시인의 생각을 짜맞추다보니 때로는 불필요한 말, 불필요한 수사학적 언사가 많고 반복된다는 것도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너무 수다스럽다. 한마디로 충분한 것을 두 마디 세 마디로 단어만 바꾸어 반복하는 경향이 있음을 그는 간파 한 것이다. 그는 4행 (quatrain) 3개와 2행 (couplet) 1개 로 구성된 셰익스피어 소네트를 재구성하여 4행을 각각 1행으로, 2행을 1행으로 축소하여 14행의 소네트를 4행으로 번역하는 시도를 하였다. 예를 들어 그는 소네트 29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하였다.

     운명과 세인의 눈에 천시되어,
     나는 혼자 버림받은 신세를 슬퍼하고,
     소용없는 울음으로 귀머거리 하늘을 괴롭히고,
     내 몸을 돌아보고 나의 형편을 저주하도다.
     희망 많기는 이 사람,
     용모가 수려하기는 저 사람, 친구가 많기는 그 사람 같기를
     이 사람의 재주를, 저 사람의 권세를 부러워하며,
     내가 가진 것에는 만족을 못 느낄 때,
     그러나 이런 생각으로 나를 거의 경멸하다가도
     문득 그대를 생각하면, 나는
     첫새벽 적막한 대지로부터 날아올라
     천국의 문전에서 노래 부르는 종달새,
        그대의 사랑을 생각하면 곧 부귀에 넘쳐,
        내 운명, 제왕과도 바꾸려 아니 하노라.

     그는 이 번역을 다음과 같이 4행으로 단축해버렸다.    

     내 처지 부끄러워 헛된 한숨 지어보고,
     남의 복 시기하여 혼자 슬퍼하다가도,
     문득 너를 생각하면 노고지리 되는고야,
     첫새벽 하늘을 솟는 새 임금인들 부러우리.

     만약 셰익스피어가 살아있어 이처럼 한국에 피천득이란 사람이 자기의 소네트를 가지고 이런 시도를 한 것을 보았다면 과연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가 궁금하다. 결코 불쾌해 한다거나 무시해 버릴 수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불필요한 수다스러움이 없어진 간결함에 놀라거나 경탄할 것이다. 한 수 배웠다고 고마워할 것이다. 아니면 한방 먹었다고 허탈해 할 것이다.

     피천득은 이런 대단하고도 엄청난 일을 혼자서, 재미로, 틈틈이, 묵묵히 시작하여 소리 없이 이 큰 일을 끝내 세상에 남기고는 표표히 떠났다. 그리고 세상에 떠벌이지도 않았다. ‘산호와 진주’에는 그의 시와 수필만이 아니고 그의 번역도 포함되어야만 한다.  
     (2012년 5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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