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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TERARY WORKS


보스토크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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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시 ‘보스토크 호수’라고 들어본 적이 있으세요? 아마 못 들어 보셨을 거예요. 왜냐하면 이 런 이름의 호수는 현재 당신이나 내가 가지고 있는 보통 지도에는 없을 터이니까요. 더구나 이 호수는 지구상에는 없어요. 지하에 있어요. 좀 더 정확하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남극대륙의 단단한 얼음 밑 2 마일 (3200 미터) 아래에 있답니다. 나 자신도 영문 주간지 타임 최근 호 (2012년 3월 12일 자)에서 이 호수에 관한 기사를 읽기 전까지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아 그래요? 그래서요? 당신 오늘 또 무슨 강의를 하려는 거요?

     아 잠시 기다리세요. 뭐 그리 바빠요?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잡지에 실린 이 기사에 의하면 약 한달 전 (정확하게 지난 2월 5일) 남극대륙 기지에서 일하는 러시아 과학자 연구팀은 인류 역사상 또 하나의 기록을 달성하였답니다. 이들은 혹독한 기상조건 하에서 지난 십여 년간 간헐적으로 남극대륙의 바위처럼 단단한 만년빙을 굴착하여 내려가 드디어 목적지 ‘보스토크 호수’에 도달하였다는 것입니다. 빙하기에 형성된 이 호수는 지난 3천4백 만년 동안 빛과 공기로부터 완벽하게 차단되어 밀폐된 상태로 차가운 얼음 속에서 고이 잠을 자고 있었다는군요.

     음. 재미있네요. 그래서요? 빨리 요점을 말해요.

     네. 알았어요. 좀 기다려요. 너무 재촉하지 말아요. 이 탐색작업에 종사하고 있는 과학자들이 예측하고 기대하는 바에 의하면 이 호수의 물에는 지금까지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고 있는 미생물이 살고 있을 것이며, 물의 온도와 화학적 구성성분은 태양계에 속하는 목성 주위를 선회하는 위성 가운데 하나인 유로파와 유사하기 때문에 이 호수의 연구는 지구 이외의 다른 행성에 존재할 수 있는 생명체의 연구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할 수도 있으며, 한걸음 더 나가 생명체의 근원을 밝혀주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음, 그렇군요. 듣고 보니 그럴듯하군요. 참으로 대단한 발견이군요.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당신은 과학자가 아니지 않소? 당신의 전공은 영문학이지 지질학이나 미생물학 또는 천체물리학이 아니지 않소? 당신은 기껏해야 시나 소설을 읽고 가르치고, 가끔씩 신문에 수필이나 기고하는 문인이지 이런 과학적인 이야기할 전문가가 아니란 말이요. 그리고 말이 났으니 말이지 생명의 시작이나 근원에 관한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그동안 여기저기서 듣기도 했고 읽기도 했지만 모두가 다 그럴듯한 이론이거나 가설로 판명나지 않았소? 그러니 제발 더 이상 뭐 좀 아는 체 하지 말고 이 강의는 여기서 즉시 끝냈으면 좋겠소.

     아 그렇군요. 잘 알았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곧 끝내도록 하지요. 그저 조금만 더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너무 짜증내지 마세요. 짜증은 건강에도 해로우니까요. 나도 이 빙하 호수의 과학적 가치나 의미를 이해하고 설명할 정도의 충분한 과학적 지식을 갖추지 못하였음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나는 이 발굴의 과학적 의미나 영향이 아니라, 나의 전공인 문학연구에서 흔히 언급되는 상징적 의미와 가치에 대하여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서 보스토크 호수의 문학적 내지 인문학적 이해나 해석이라고 하면 되겠지요. 어때요? 그럴듯하지요? 자, 이왕 여기까지 잘 참아 주셨으니 인격수양 하시는 셈 치고 조금 더 나의 강의를 들어 주세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당신 참으로 뻔뻔스럽고 끈질긴 사람이구려. 도대체 포기할 줄을 모르는 구려. 당신의 그 끈질김과 뻔뻔스러움에 내가 손들었소. 좋소. 어디 마음껏 해보시구려. 죽은 사람의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감사합니다. 그럼 강의 다시 시작합니다. 인간의 손이 드디어 보스토크 호수에 도달하였다는 사실은 한마디로 과학기술의 승리를 알리는 또 하나의 낭보이자, 이와 동시에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채로 남아있던 몇 안 돼는 순수한 자연환경 가운데 또 하나가 살아지고 훼손되었음을 알려주는 비보이기도 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과학적 연구나 탐사의 이름으로 성스럽고 신비스러운 또 하나의 자연의 영역을 침범하였습니다. 그림형제 동화집에 나오는 “잠자는 숲 속의 미녀”처럼 보스토크 호수는 얼음의 궁전 속에서 수천 년 동안 지금까지 평화롭고 고요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아닙니다.  드디어 극성스런 우리 인간의 손이 거기까지 도달한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지구상에는 보스토크 호수처럼 인간의 손길이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은 곳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이런 장소들은 우리 인간이 가기에는 너무 먼 곳에, 너무 높은 곳에, 너무 깊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이런 금지된 장소에 차례로 손을 뻗혀 도달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이제 좋은 장비와 발달된 기술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원하는 곳이면 어디나 갈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에베레스트 산의 정상은 이제 힐러리 경과 같은 특별한 등산가만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아문젠이나 스코트 대령 이래로 남극을 다녀온 모험가들은 이미 수도 없이 많습니다. 알고 보면 이제 이 지구상에는 인간의 흔적이 없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달에도 다녀왔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인간의 입김과 영향력을 느낄 수 있으며, 이런 인간의 영향력은 너무나 강하고 광대하여 이제는 어디를 가나 과거에 우리가 알고 있었고 시인들이 즐겨 찬양하였던 순수한 자연은 어디에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태초엔 자연 뿐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자연이었고 인간은 자연의 한 구석을 빌어 사는 미미하고 미약한 존재였습니다. 한때 인간은 자연이 베풀어 주는 자비심에 전적으로 의지하였습니다. 자연은 우리 인간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변덕스럽고, 잔인하고, 흉포한 존재였습니다. 수시로 자연은  지진으로, 가뭄으로, 기근으로, 홍수로, 전염병으로 인간들을  죽이고 위협하였습니다. 자연의 이런 횡포 앞에서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살려달라고 비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인간은 자연이란 막강한 군주 앞에서 자비를 비는 나약하고 비참한 신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정이 변했습니다. 인간이 오히려 자연을 지배하게 된 때가 왔습니다. 이제는 영리한 인간 앞에서 지금까지 군림하여온 자연이 무릎을 꿇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 인간은 원하기만 하면 자연을 가지고, 자연에 대하여, 자연에 대항하여 못하는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흉악한 야생동물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들을 길들여 온순하게 만들 줄 도 알며, 바다를 메워 육지로 만들며, 비를 오게 할 수도 있고, 기후를 조절할 수도 있으며, 바위도, 얼음도 뚫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포함해서 어떤 생명체의 종을 단번에 멸종시킬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최근 남극대륙 상공에 있는 오존층의 경우에서 보듯이 자연을 파괴할 수도 있고 복구할 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 인간은 이제 우리 지구라는 행성의 자연 자체를 송두리 채 바꾸어놓을 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명실공이 인간이 자연 위에 군림하는 제왕이 되었습니다.   

     이제 자연 대 인간이라느니, 반대로 인간 대 자연이라는 대립 개념은 없어졌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 둘 사이의 경쟁관계나 대립관계는 일단은 인간의 승리로 끝났다고 해도 좋습니다. 이제 어떤 것이 자연이고 앞으로 어떤 것을 자연으로 남길 것인가는 전적으로 인간이 정하기에 달렸습니다.  언제 어떻게 자연이 다시 복수를 하고자 반격을 가해 올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현재로서 분명한 사실은 이제 어디에도 에덴동산은 없으며, 있다 해도 인간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결코 좋아할 일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불안하기도 합니다.  앞으로 닥쳐올지도 모를  끔찍한 자연재해는 모두가 승자인 인간의 책임입니다.  패자에게는 책임을 물어도 소용없습니다. 오늘따라 나의 두 어깨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느껴집니다. 자연의 무게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자연을 송두리째 짊어졌기 때문입니다.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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