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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회에 다니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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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초가 되면 나는 KBS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적지 않은 액수의 돈을 보내 좌석을 새로 예약하고, 매달 그곳에서 보내주는 프로그램을 우편을 통하여 받고 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주위의 사람들은 아마도 내가 음악에, 특히 고전음악에, 남다른 정열과 사랑, 그리고 깊은 조예가 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으련마는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신앙심은 별로 깊지도 않으면서도 매주 일요일에는 꼬박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나도 매달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되는 정기연주회에는 가능한 한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다. 따져보니 내가 KBS 교향악단과 인연을 맺은 지도 어언 삼십년이 넘는다.

     이처럼 내가 음악회에 가기 시작한 것은 처음부터 음악이 좋아서가 아니라 베토벤, 슈베르트, 모차르트, 브람스, 바흐, 바그너, 말러 등과 같은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 때문이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무슨 업적을 남겼기에 이처럼 대단한 명성을 누리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특히 그 교향곡이라는 것이 그랬다. 처음 얼마동안 그것을 끝까지 듣는 일은 목사님의 지루한 설교만큼이나 큰 고통이었다. 때로는 고통 정도가 아니고 정신적 신체적 고문이었다. 한 악장도 아니고 네 악장이 끝나기를 기다리자니 몸부림이 나고 죽을 지경이었다. 한 마디로 너무 길었다. 다행스럽게도 이제 와서는 이런 시련을 모두 이겨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참고 견딜만한 경지에는 도달하였다.

     나는 음악적인 감각이나 재능은 별로 타고나지 못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악기들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다루지 못한다는 사실 한 가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피아노만 해도 그렇다. 나에게도 피아노를 배울 기회는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말았다. 우선 악보를 읽거나 이해할 수 없었으며, 악보에 따라 두 손이 움직여주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하고 집중해도 두 손이 제각기 제멋대로 놀았다. 결국 얼마동안 시도해 보다가 초보단계에서 그만 두고 말았다. 지금에 와서 나는 이 사실을 크게 후회하고 안타깝게 생각한다. 나이 들어 혼자 집에 있게 되는 시간이 많은 이때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즐겁고 큰 위안이 될 것인가! 시력이 나빠져 책읽기가 어려워지니 더욱 그렇다. 노인이 되어서는 어린애처럼 무엇인가 혼자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 필요하다.  

     나에게 예술가운데서 음악, 특히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곡은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운 대상이다. 문학이나 미술, 또는 조각과 비교해서 음악은 항상 풀지 못하는 퍼즐(수수께끼)이다. 이해하지 못하니 즐기지도 못한다. 순전히 소리로 이루어진 이 작품들을 좀 더 잘 이해하고 감상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지만 그 일이 그리 쉽지가 않다. 예술작품이란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그 본질은 신비스럽고 경이로운 것이지만 이 눈에 보이지 않고 들리기만 하는 음악은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 한량없는 일은 이 음악에 남다른 감각(특히 청각)을 타고나 이 멜로디 속에서 모든 것을 듣고, 보고, 느끼고, 상상할 수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 사람들은 순전히 소리만 듣고도 계절을 구분할 수도 있고, 색깔도 구분할 수 있으며, 그 속에서 세상만사 인간의 희로애락을 모두 느낄 수 있는 듯하다. 새들의 노래, 푸른 하늘에 흘러가는 흰 구름,  굽이치는 강물, 숲을 스쳐가는 바람,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을 듣고 본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이런 경지에는 들어서지 못하였다. 이런 경지에 들어서려면 아직도 갈 길이 아주 멀다고 느낀다.  

     이런 처지에 있는 내가 매년 나의 얼마 되지 않는 용돈에서 적지 않은 액수를 선뜩 떼어내어 KBS 교향악단에 보내고, 매달 한번 열리는 정기연주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이유는 언젠가는 나도 이런 경지에 도달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다. 처음부터 신앙심이 깊어 교회에 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다니다 보면 없던 신앙심도 생기는 법이다. 시인 소월이 <팔벼개 노래>에서 “첫날에 길동무/ 만나기 쉬운가, 가다가 만나서/ 길동무 되지요.” 라고 노래 하였듯이, 같은 이치로 아직 나는 음악의 그 큰 축복과 즐거움을 잘 모르고 있지만 언젠가는 나에게도 이런 은총이 주어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이 은총의 서광은 이미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나는 음악 자체는 아니더라도 음악회가 열리는 그날 그곳에 모이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그 분위기를 무척 좋아한다. 나는 그곳에서 다른 세계와 다른 사람들을 본다. 이 사람들에게는 여유와 낭만이 있다. 모두가 부드럽고, 예의바르고, 여유로워 보인다. 거기에는 평화와 질서가 있다. 연주가 계속되는 동안의 고요함 속에서 나는 종교적 경건함을 경험한다.

      종교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이 교향악단의 연주를 보고 있노라면 나는 나도 모르게 어느 종교의 의식에 참가하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아닌게 아나라 종교와 예술 사이에는 그 기원이나 역사, 목적이나 효과, 그리고 그 형식이나 절차에 있어서 유사점 내지 공통점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는 그의 권위나 역할에 있어서 어떤 종교의식을 주관하거나 이끄는 고명한 목사나 승려와 다름없다. 지휘자는 그날의 의식을 진행함에 있어서 누구도 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권위를 누린다. 지휘자의 지휘봉을 따라 일호의 착오도 없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오케스트라 대원들의 손놀림 속에서 나는 기적 아닌 기적을 본다.  

     위에서 슬쩍 언급하였듯이 내가 한 달에 한번 음악회에 가는 것은 기독교 신자가 매주 교회에 나가는 것과 유사하다. 신자들이 경건한 태도와 복장으로 일요일이 오면 교회에 가듯이, 음악회에 가는 날이면 나도 복장과 외모에 꽤나 신경을 쓴다.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이날만은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다. 교회에 가기 싫어하는 남편을 어떻게 해서라도 교회에 끌고 가는 아내처럼, 나는 집안일에 지쳐 이 핑계 저 핑계 하면서 가기 싫어하는 아내를 꼭 대동한다. 그리고 이날만은 택시를 타지 않고 내가 손수 경건한 마음으로 드라이브를 한다. 교회에 가는 사람들이 두툼한 성경책을 손에 들고 가듯이, 나도 얄팍한 그날의 프로그램을 꼭 챙긴다.

     나는 <예술의 전당> 구내에 있는 우아한 양식당 <모차르트>에서 저녁을 먹기 위하여 일찌감치 출발한다. 이곳에 오면 주문도 내가 하고 돈도 매달 타 쓰는 나의 용돈에서 지불한다. 이런 일은 대단히 예외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다른 경우에는 예외 없이 아내가 주문하고 지불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동안 내가 번 돈은 퇴직과 함께 몽땅 아내의 소유가 되어버렸으며, 이제 모든 경제활동과 이에 따른 결제행위는 전적으로 아내에게 위임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이곳에서만은 내가 지불하는 것을 고집한다. 왜냐하면 오늘은 특별한 날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성당에 가면 고해성사를 하여 마음을 가볍게 하듯이 듯이, 나에게도 이 음악회와 관련하여 좀 부끄러운 일이기는 하나 이 자리에서 이 기회에 털어놓고 싶은 비밀이 있다. 그것은 우리 부부의 좌석의 위치가 지난 이십여 년 동안 변함없이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1층 E블럭 22열 1번과 2번 나란히 있다는 것이다. 점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오케스트라가 위치한 무대에서 가장 먼 맨 뒤에 있으며, 반면에 뒤 출입구에서는 가장 가까운 곳, 즉 들어서면 바로 코앞이다. 우리가 이 끝 좌석을 선호하여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가격이 싸고 출입이 용이하다다는 이점 이외에, 편안히 눈을 감고 쉬기가 좋다는 점이다. 나는 연주가 시작되기가 무섭게 눈을 감고 휴식에 들어간다. 고된 하루 일에 지친 아내도 마찬가지다. 말이 휴식이지 잠을 자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도 모르게 코를 골 때도 있다. 그러나 좌석이 맨 뒤에 있기에 다른 감상자들의 눈에 덜 띄는 유리한 점이 있다. 음악은 주로 꿈속에서 듣는다.

     음악회에서 연주가 끝나기가 무섭게 서둘러 자리를 뜬다는 것은, 마치 교회에서 예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목사님이나 다른 신도들에게 인사도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나 다름없이 예의에 어긋나고 상식에 위배되는 일이다. 연주가 모두 끝나고 나서도 청중은 자리에 앉아 지휘자에게 열광적으로 박수를 치고 (그것도 여러 차례), 독주자가 있는 경우는 앙코르 곡의 연주도 요청하고, 듣고, 또 박수를 치고 (더 열광적으로 여러 차례), 마침내 오케스트라의 대원들이 모두 자리를 뜨고, 무대가 텅 빈 것을 확인하고, 장내에 꺼졌던 조명도 들어와 통로가 환하게 밝아졌을 때,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여유 있게 걸어 나가는 것이 음악회의 예의요 상식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나는 연주가 끝나기가 무섭게, 때로는 3악장이 끝나고 4악장이 시작되기 바로 전에 자리를 떠 다른 사람들 보다 먼저 지하 주차장으로 달려가 제일먼저 차를 뺀다. 조금만 더 지체하였다가는 지하 주차장의 매연 속에서 삼십분에서 한 시간 이상 꼼짝없이 갇혀야만 하는 고통을 겪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처럼 매번 부끄러운 행동인줄 뻔히 알면서도 음악회의 신성한 에티켓을 뻔뻔스럽게 위반하는 것은 나의 몰상식한 이기심에 그 책임이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빠져나가기 쉬운 유리한 좌석 위치가 가져다주는 특권과 유혹 때문이기도 하다. 해마다 좌석의 위치를 변경해야지, 변경해야지, 하면서 못 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새해에는 꼭 실행에 옮길 각오이나 과연 실행에 옮겨질는지는 역시 의문이다. 진정한 음악 애호가로서의 길은 이래저래 기독교인이 천국에 이르는 길만큼이나 멀고도 험하다.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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