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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무엇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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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즈음 무엇 하세요?”

     대학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나면서부터 얼마동안 나는 이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아야만 했다. 언제 어디서고 제자나 친구, 전 현직 선후배 동료교수들을 만나면 예외 없이 “요즈음 무엇 하느냐?”가 인사였다. 퇴직 전에도 자주 들어온 질문이지만 퇴직을 하고나서 들으니 새롭게 닥아 왔다. 솔직히 말해서 별로 좋게 들리지 않았다. 퇴직에 따른 나의 변화된 사회적 위상과 그에 따른 나의 상실감과 무력함을 새삼 강조하고 상기시켜 주는듯한 질문으로도 들렸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대답은 해야만 했는데 적당한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이제는 집에서 논다거나 쉰다는 말은 하기가 싫었다. 무어라고 얼버무리면서도 항상 좀 찜찜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시간이 좀 흐르면서 나는 곳 이 질문에도 익숙해 졌다. 아직도 이 질문이 가장 먼저 또 가장 많이 나에게 건네지는 질문이 아닌 인사말이다. 나는 이들이 내가 현재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관심이나 흥미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질문한 사람 체면을 생각해서 한마디 한다. “하긴 뭘 해요, 놀지.” 이 말 한 마디면 족하다. 모두가 만족하고 행복하다. 이제는 나도 이 질문을 갓 퇴직한 후배 교수들을 만날 때면 자주 써 먹는다. 아주 편리한 인사말이다.  

    그러나 소수이기는 하지만 아주 진지하게 나의 퇴직 후의 생활에 대하여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대개가 이제 막 정년퇴직을 하였거나 정년을 몇 년 안 남겨둔 후배 교수들이다. 나의 부지런했고 규칙적이었던 생활태도에 대하여 비교적 잘 알고 있는 이들은 진정으로 현재 나의 은퇴 후 생활에 대하여 한마디 듣고 싶어 한다. 정년퇴직을 앞두고 이들은 마치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들처럼 앞으로 닥아 올 새로운 생활에 대하여 희망과 기대, 동시에 걱정으로 가득 차 있다. 이들은 겉으로는 태연하고 자신 있어 보이지마는 속으로는 그들의 앞에 놓여있는 많은 한가한 시간과 막연한 가능성 앞에서 불안하고 초조하기도 하다. 이들은 이제부터 새롭게 시작되는 세상을 슬기롭게 대처할 어떤 방법이나 지혜가 필요하다. 이들이 이 문제에 관한한 인생의 선배격인 나에게서 한 수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들은 나로부터 “하긴 뭘 해요, 놀지” 이상의 대답을 듣고 싶어 한다.

    최근에 와서 정년퇴직의 개념은 개인에 따라 차이는 있다 하겠으나 일반적으로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과학적 변화와 발전에 의하여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준비된 경제력과 신체적 건강, 늘어난 평균수명, 다양화된 활동기회 등은 사람들로 하여금 퇴직 후 집에서 할일 없이 놀거나 한가한 시간을 보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들은 놀기는커녕 오히려 지금부터 더 정열적으로 무엇인가 하려는듯하다. 지금까지 하여온 힘든 일에 지쳤다거나, 무거운 짐을 어깨에서 내려놓게 되어 홀가분하다던가, 이제부터는 한가하게, 여유 있게 살아가겠다는 생각은 아무에게도 없는 듯하다. 이들은 마치 또 하나의 새로운 경주를 시작하기 위하여 출발선상에서 몸을 풀고 있는 장거리 선수들 같다. 이들은 하나같이 흥분해 있고 무엇인가 해보겠다는 의욕과 정열로 가득 차 있다.

    오년 전, 정년퇴직을 앞두고 풀이 죽고 기가 꺾이고 막연히 초조하고 불안해하였던 나의 모습과는 달리, 이들은 모두가 자신만만하고 새로운 계획과 구체적인 스케줄로 가득 차 있다. 어떤 사람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탱고 춤을 배우겠다고 한다. 또 누구는 사진을 공부해 보겠다는 계획이다. 그림을 그려보겠다는 친구도 있다. 색소폰이나 트럼펫과 같은 악기를 하나 새로 배우겠다는 친구도 있다. 세계의 오지를 여행하여 위대한 여행기를 하나 쓰겠다는 사람도 있고, 이제부터 중국어를 공부해 보겠다는 사람, 라틴어를, 심지어 희랍어를 새로이 시작해 보겠다는 사람도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지금까지 하고는 싶었으나 직장 일에 얽매여 하지 못하였던 일을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달라붙어 해보겠다는 각오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새로 사업을 크게 벌여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벌겠다고 공언하는 사람도 있고 또 성공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 열성과 각오가 대단하다. 나처럼 한가하게 게으름을 피워보겠다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정년퇴직 같은 것은 없는 시대다.  

     나도 지금까지 “요즈음 무엇 하세요?” 하는 질문에 웃으면서 “하긴 뭘 해요, 놀지”라고 대답해오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꽤나 바쁘다. 퇴직하기 전과 차이가 있다면 학교에 가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없어진 것뿐이다. 이것 말고는 지금까지 해오던 일의 연속이요 계속이다. 아침에는 어김없이 일찍 일어난다. 오히려 전보다 더 일찍 일어난다. 커피도 손수 끓여 하루에 어김없이 세잔은 마신다. 아침마다 면도도 정성들여 깔끔히 하고, 친구도 만나러 나가고, 병원에 입원한 친구 문병도 간다. 결혼식에도 가고 장례식에도 간다. 제자들 주례도 서준다. 주말에는 친구들과 등산을 간다. 예전처럼 책도 읽고, 글도 가끔 쓰고. 영문 잡지들도 (타임, 뉴스위크, 내셔널 지오그래픽)도 계속 구독해 읽고 있다. 신문도 보고, TV도 본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아파트 주변에 산책을 나선다. 유니세프에 아직도 매달 적은 액수나마 헌금도 한다. 현재 양평 초등학교 제 40회 동창회장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반복하건대 내가 퇴직을 한 후 하지 않는 일은 학생들 가르치고 월급 받는 일 뿐이다. 이것 빼놓고는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 아, 그러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정년퇴직 전과 후가 이렇게 다르다니!

    이제 전처럼 아무리 부산을 떨어보아도 다 부질없는 일이다. 이미 사람들은 내가 할일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해 버린 것 같다. 하는 일이라고는 집에서 하루 종일 소파에 앉아 TV의 채널이나 돌리면서 꾸벅꾸벅 졸고나 있다고 생각한다. 한껏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손자나 손녀 학교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저사람 지루해서 죽지나 않을까 염려도 할 것이다. 지금쯤 생활도 아주 게을러지고 불규칙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벽 2시에나 잠이 들어 아침 10시에나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다! 아니다! 나는 아침 5시에 일어나려고 꼭 알람을 맞춰놓고 잔다. 직장에 다닐 때는 낮잠도 잦지만 요즈음은 낮잠도 자지 않는다. 시간이 아까워서이다. 밤늦게까지 TV를 보는 일은 옛날 일이다. 그러나 이처럼 부지런을 떤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다 필요 없는 일, 헛된 일이다. 만나기만하면 “요즈음 무엇 하세요?” 하고 묻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내가 무엇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작 더 기막힌 일은 이제는 나에게 “요즈음 무엇 하세요?”하고 물어보는 사람조차 없다는 사실이다. 최근 들어 어디에 가나 누구를 만나도 이제 이런 인사조차 하지 않는다. 이제 이런 형식적이고 의미 없는 질문일망정 건네줄 값어치조차 나에게는 아예 없어진 것이다. 나는 이제 완전히 잊혀졌다. 아직 살아있다 해도 그만 이미 죽었다 해도 그만이다. “요즈음 무엇 하세요?” 하는 질문을 매 맞듯이 맞고 기분 언짢아하던 때가 그립다. 바로 오년 전이다. 아무도 없어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집에 혼자 있게 되면 나는 혼자 중얼거린다. “당신 지금  무엇을 하고 있소?” 내가 묻고는 내가 대답한다. “하기는 뭘 해. 놀지.”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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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1

송상호님의 댓글

송상호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이창국 교수님 안녕하세요?

저 중앙대 영어교육과 99학번 송상호라고합니다.
지금 코리아헤럴드 정치사회부 국방부 출입 기자입니다. (기억 나실런지 모르겠습니다)
교수님 칼럼 "What are you doing" 읽고 교수님 생각이 나서 메일 보내봅니다.
언론사라 신문 하루 전에 볼 수 있어서 오늘 저녁에 신문 살펴보다가 교수님 칼럼이 있어서 재밌게 읽었습니다.

영어로 글 쓰는 일을 하면서 교수님 생각 간간히 했었는데.. 교수님 사진 실린 글 보니 어찌나 반갑던지요...
옆에 기자 선후배들한테 교수님 제자라고 자랑했습니다^^
지금 일이 너무 많아서 하루하루 허덕이는데.. 대학 때 공부에만 매진할때가 참 그립습니다.
교수님 수업 들어가서 "별" 따던 재미도 솔솔했었는데 말이죠.. 참 좋은 추억이었던 것 같습니다.
교수님 글 읽으면서..왠지 교수님께서 외로운신가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수님 화이팅하시구요.
 항상 저를 포함한 제자들을 교수님 최고의 교수님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써주세요.. 열심히 읽고 배우겠습니다. 건강하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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