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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TERARY WORKS


영시와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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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마다 5월 학기말이 가까워 오면 서울 흑석동에 있는 중앙대학교 캠퍼스 한구석에서는 어김없이 “영시와의 오후” 라는 낭만적인 행사가 열린다. 매년 한 학기 걸러 개강되는 나의 “영시” 강의를 수강하는 영어교육과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개최하는 이 행사는 교실에서 공부한 영시를 장소를 옮겨 여러 청중들 앞에서 낭독하여 영시의 참 맛을 감상함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러니까 이 행사는 무슨 특별한 행사라기보다는 수업의 연장으로 낭독하는 사람들도 청중들도 모두가 나의 강의를 이미 수강하였거나 현재 수강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행사가 지금까지 단 한번도 거르지 않고 열려 금년으로 24번째 생일을 맞이하였다.


     행사의 내용도 지극히 간단하다. 보통 10편에서 15편의 시가 낭독된다. 한 편의 시를 읽는데 두 사람이 동원된다. 사회자가 낭독할 시에 대하여 자기의 의견을 곁들여 간단한 소개를 한다. 한 사람이 먼저 영어로 시를 낭독하면 다른 한 사람은 우리말로 번역된 이 시를 읽어 청중들의 이해를 돕는다. 이날의 행사에 참가하는 남학생들은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 정장을 하고, 여학생들은 가능한 한 최대로 화려하고 우아한 옷을 입는다. 은은한 음악이 행사장의 분위기와 무드를 고조시킨다. 행사는 중간에 한차례 짧은 휴식시간과 피아노 또는 바이올린 연주와 같은 여흥을 포함하여 약 2시간 걸린다. 행사가 끝나면 선후배들이 행사에 참가한 학생들에게 준비한 장미꽃을 한 송이 씩 선사하고 함께 사진도 찍는다. 저녁을 겸하여 선후배들이 모여 벌이는 자축 뒤풀이도 있다.
  
     이 행사는 그 이름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왁자지껄하거나 특별히 재미가 있는 행사는 아니다. 그저 조용하고 차분한 행사다. 어떤 사람에게는 지극히 따분하고 지루하기 이를 데 없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약점을 보완하는 내용으로 행사의 내용이 많이 개선된 것도 사실이지마는, 근본적으로 영시라는 것을 접할 기회가 없어 영시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 흥미가 전혀 없거나 전무한 사람에게는 크나 큰 고통의 시간일 수도 있다.

     행사에 흥미를 가지고 적극 참가하는 학생들에게도 적지 않은 부담이 따른다. 이들에게는 행사를  앞두고 학과 공부 이외에 하여야만 할 일이 많다. 우선 낭독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남의 앞에 서야만 하니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선택한 시를 목소리를 가다듬어 거의 암송에 가까울 정도로 읽고 또 읽어야만 한다. 직접 낭독에 참가하지 않는 학생들도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과 포스터도 준비하여야만 하며,  프로그램도 만들어 행사 참가자들에게 나누어주어야만 한다. 시간, 노력 그리고 돈도 드는 일이다. 한마디로 귀찮은 일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나의 학생들은 해마다 오월이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벚나무 가지 위에 벚꽃이 피어나듯이 이 행사를 준비한다.
  
     위에서 잠깐 언급하였듯이 이 행사는 교실에서 진행되는 수업의 연장이다. 그러나 정작 이 행사에 참가하고 또 이 행사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는 모든 학생들에게 있어서 이 행사는 분명 그 이상이다. 이제 이 행사는 학과의 귀중한 전통이요 문화이며, 잊을 수 없는 학창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버렸다. 생각하지 않은 곳에서 오랜만에 우연히 만난 졸업생이 다른 것 다 제쳐놓고 아직도 그 “영시와의 오후”가 해마다 계속되고 있느냐고 물어 오는 경우가 가끔 있다. 이럴 때마다 나는 새삼 이 행사의 위력을 느끼며, 한편으로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본다.

     지금까지 이 행사가 단 한차례의 중단도 없이 면면히 그 전통을 이어온 저변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는 역시 영시를 공부한 학생들이 갖게되는 영시에 대한 사랑과 정열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충분하지 못한 영어 실력을 가지고 영어로 쓰여진 최고 수준의 문학작품에 도전하는데는 많은 부족함과 어려움이 있지만 그래도 제한된 시간 안에 몇 편 안 되는 영시를  만나 먼발치에서나마 발견하게되는 진선미의 세계는 학생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한 것 같다. 영시 속에 이런 가치가 없다면 십중팔구 이 행사는 처음 몇 번 계속되다가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이미 오래 전에 흐지부지 되어버렸을 것이다. 이런 진정한 가치가 영시 속에 있는 한 한번 뿌리내린 “영시와의 오후”도 덩달아 면면히 그 생명을 이어갈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25년 전 이 학교에 부임하여 영시를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바로 그 다음해부터 이 행사를 시작하여, 이제 다음 이 학기를 끝으로 정년퇴직을 맞이하게 된 나로서는 마지막으로 갖게되는 이번 24번째 “영시와의 오후” 행사에 남다른 감회를 아니 느낄 수 없다. 기쁘고 대견스런 일은 시간이 흐르면서 해마다 모든 면에서 행사의 내용과 수준이 끊임없이 발전되었고 세련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누구의 지도나 도움 없이도 학생들 스스로 모든 일을 알아서 척척 처리하게 되었기에 지도교수로서 잔소리 할 기회가 없어져버렸다는 사실만이 오히려 섭섭할 뿐이다. 나는 이제 쓸모가 없어졌음을 느낀다. 다행히도 물러날 때가 찾아온 것이다.

     오늘 아침 나는 교정 한 귀퉁이에 금년 봄 “영시와의 오후”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오월의 미풍에 흔들리면서 걸려있는 것을 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돌이켜보니 지금까지 나는 단 한번도 이 행사에 빠진 적이 없었다. 몸이 아파서, 집안에 급한 일이 생겨서, 또는 학교 일 등으로 한두 번 정도는 참석하지 못할 수도 있었겠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지만  새삼 신기하면서도 기특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간의 나의 생활이 단조롭고 평온하였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따져보니 나는 그 동안 영시와 함께, 영시를 읽으면서, 영시를 가르치면서 살아온 셈이다. 이런 행운을 타고난 사람이 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사에 끝이 있듯이 행복에도 끝이 있는 법, 나에게도 “영시와의 오후”를 포함하여 이 캠퍼스 안에서 내가 지금까지 젊음을 다 바쳐 아끼고 사랑했고 누려온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작별을 고할 때가 찾아온 것이다. 나는 행복에 겨운 부질없는 눈물이 고이는 것을 억지로 콧등으로 이겨내면서 “영시와의 오후”에 애정 어린 마지막 작별을 고하였다. 
       (2005년 5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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