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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TERARY WORKS


마지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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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즈음 나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생소한 기분으로 책 한권을 읽고 있다. 『영국 전통 수필』(English Familiar Essay)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교의 윌리엄 F. 브라이언 교수와 로널드 S. 크레인 교수가 유명한 영수필만을 집대성한 두툼한 책이다. 1916년 출판되었으니 사람으로 말하면 수명이 올해 94세인 셈으로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 가운데서 단연 제일 오래된 책이다.  이 책이 나의 수중에 들어온 때는 내가 대학에 입학한 1960년이었으니 따지고 보니 이 책은 지난 반세기 이상 나와 함께 살아온 셈이다.

     나는 이 책을 당시 교문 옆 길가에서 헌책을 몇 권 진열해 놓고 팔았던 행상으로부터 산 것으로 기억한다. 이 사람은 어디서 구해 왔는지 항상 영문원서 두 서너 권을 신문지 위에 올려놓고는 묵묵히 서 있었다. 당시는 외화 부족으로 지금처럼 수입이 자유롭지 못한 때였고, 복사기도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원서를 구하기가 아주 어려운 때였다. 중년이 약간 넘어 보이는 이 상인은 비록 남루한 복장이었으나 어딘가 퍽 교양 있어보였다. 그가 벌려놓은 몇 권 안 되는 원서 가운데는 신기하게도 영문학에 관한 귀중한 고전들이 들어있었다. 그때 이 상인으로부터 구입한 책이 이 수필집 말고도 몇권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현재 나에게 남아 있는 책은 이 수필집뿐이다.  나의 나이를 감안하여 볼 때 지금쯤은 그 분도 아마 이 세상 사람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그 사람 생각이 난다.

     나는 지금까지 이 수필집 속에 수록된 수필 대부분을 그런대로 한번 씩은 다 읽어보았다. 어떤 것은 필요에 의하여 여러 번 읽은 것도 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여 그 짧은 영어실력을 가지고 이들 가운데 한두 편을 처음 읽어보았을 때 나는 참으로 난감했다. 한마디로  너무 어려웠다. 그래도 이 작품들이 영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대단한 명성을 누리고 있는 수필가들의 작품이라는 사실에 나는 가슴이 설레었고, 그저 이런 대가들의 작품을 감히 읽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가슴 뿌듯하였다. 그 후로 지금까지 읽을 때마다 영어라는 이유도 있고, 수필이라는 고도로 기교를 부린 문학작품이고, 시대와 장소가 다르다는 등 여러 이유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자주 나왔다. 사전에도 없는 단어들도 있었고, 아무리 궁리를 해보아도 그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부분도 자주 나왔다. 그런 때마다 나는 “다음에 다시 읽어보면 되겠지” 다짐하면서 나 스스로를 위안하였다. 실제로 나는 틈틈이 필요에 의하여 자주 이 책을 꺼내 읽었다. 그때마다 어려운 부분들이 조금씩 풀려나갔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제부터 나에게는 이런 여유와 위안이 없다. 나는 지금 이 책을 마지막으로 읽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아마, 아마가 아니라 실제로, 내가 앞으로 이 책을 지금처럼 처음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또 읽어볼 기회는 다시없을 것이란 말이다. 현재 나를 둘러싼 여러 여건들이 나로 하여금 이런 예단을 하게 만든다. 내가 이런 것을 가르치던 대학을 떠난 지도 이미 5년이 지났고, 이제 나는 70대에 접어들었다. 왕성하던 식욕이 감퇴하였듯이 책을 읽는 즐거움도 이제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가르친다는 현실적인 목적적이 없으니 책을 읽는다는 것이 아무래도 전처럼 신이나지 않는다. 순전히 개인적인 만족을 위하여 책을 읽는 것은 가능한 일이지만 네트를 치지 않고 테니스를 친다던가, 과녁이 없이 활을 쏘는 일이나 마찬가지로 공허하다. 관중들이 없이 운동경기를 하는 것처럼 맥 빠지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은 어떤 일을 하던지 그것이 좀 더 의미 있고 효과적이기 위하여서는 많던 적던 청중이 필요하다. 혼자서는 외롭다. 재미가 없다.  

     그리고 나의 나이에 수반하는 신체적인 증상들이 더 이상 책을 읽지 말라고 재촉하고 있다. 우선 허리가 아파 한 자리에 오래 앉아있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활자를 좀 들여다보면 눈이 가물거리고 침침해진다. 독서의 진도가 너무 느리다. 지하철 역 계단을 올라가는 노인처럼 나도 책을 읽으면서 중간에 너무 자주 쉰다. 같은 부분을 두서너 번 읽은 후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혼자 계면쩍어 웃기도 한다. 읽고 나서도 무엇을 읽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없다. 모두가 이제는 책읽기를 그만두라는 신호다.

     설상가상으로, 나의 노후한 신체처럼, 지금 읽고 있는 책도 이제는 너무 늙었다. 책도 늙는다. 견고한 커버는 이제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저 건성으로 존재한다. 종이도 세월이 오래 흐르다보니 바싹 마르고 낡아서 걸핏하면 찢어지거나 부서진다. 그래서 책장을 넘길 때는 갓난 아기 다루듯이 아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동안 찢어진 곳을 여기저기 스카치 테이프로 땜질을 해놓았는데 이제는 그 테이프마저도 붙여진 자리에 붙어있지 않고 건드릴 때마다 떨어져 나오고 있다. 이래저래 이 책을 읽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 분명하다.

     어떤 책을 “마지막으로” 읽는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이다. 지금까지 책과 더불어 살아오면서 나는 단 한 번도 나에게 이런 시간이 닥쳐오리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책은 언제고 읽을 수 있는 것이었다. 지금 읽지 않으면 나중에 읽으면 되는 그런 존재였다. 돌이켜 보니 서가에 남아있는 책들 가운데 손도 못 대고 남아있는 책들은 시간은 언제나 나의 편에 있고, 나의 젊음은 영원하기라도 한 것처럼 “나중에” 읽겠다고 태평스럽게 뒤로 미루어 놓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제 나에게는 시간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  나는 지금 시간의 모래알이 쉴 사이 없이 줄어들고 있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있다. 시간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를 듣고 있다.

      지금 내가 마지막으로 읽고 있는 이 책의 운명은 서가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몇몇 다른 책들에 비하여서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서가에는 나의 마지막 눈길과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책들이 아직도 여러 권 있지만 이들에게 내가 현재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들 가운데서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책처럼 “마지막으로”나마 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책은 아주 극소수일 것이다.  

     이 수필집 가운데서 현재 내가 읽고 있는 것은 찰스 램의 “어린 굴뚝 청소부 예찬”이다. 이 수필은 전에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도 하였기 때문에 나에게는 아주 친숙한 작품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이번 읽으면 또 다시 이것을 읽을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처음 대하는 듯이 새롭게 느껴진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마냥 천천히 읽고 있다. 그 뜻이 분명하지 않아도 그냥 적당히 넘겨짚어 온 단어는 이번에도 모르고 지나가면 영구히 미궁으로 남게 된다는 생각에 찬찬히 사전을 찾아보고 그 뜻을 궁리해본다.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부분이 나오면 예쁜 꽃이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듯 그 자리에 오래 머문다.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 아주 희귀한 단어라서 보통 사전에는 없을 때는 마지막으로 큰 사전에서 그 뜻을 다시 한 번 찾아본다. 내가 이미 오래 전에 줄과 줄 사이나 페이지의 여백 여기저기에 남겨놓은 독서의 흔적들 속에서 나는 지난날   나의 젊음과 정열의 잔해를 본다.

     이 오래된 수필집에 수록된 작품들을 마지막으로 하나하나 순서대로 천천히 주의 깊게 읽으면서  나는 지금까지 내가 해온 일에 대하여 회의도 느껴보았다. 이미 모든 것이 끝나고 난 지금에 와서 나는 한숨과 함께 다음과 같은 부질없는 질문을 해보았다. 과연 내가 지금까지 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이 과연 세상에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내가 문학 말고 다른 분야, 좀 더 현실적인, 예를 들어, 법학이나 경제학, 또는 공학을 선택하였더라면 나의 인생은 과연 어떻게 달라졌을까?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 (Robert Frost, 1875-1963)는 일찌감치 나의 이런 질문을 예상하기라도 하였듯이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라는 시를 썼다. 이 시에서 시인은 숲 속으로 난 두개의 길을 바라보면서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 망설인다. 다른 길은 "나중에" 가 보리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시인의 길을 택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선택한 길 이외에 또 다른 길을 가 볼 수 있는 기회는 일생에 없을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시인은 먼 훗날 “나는 남들이 덜 다니는 길을 택하였다네, / 그것이 이처럼 큰 차이를 만들 줄이야.”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라고 한탄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시를 끝맺는다. 

사람은 누구나 일생 한번쯤 가보지 못한 길을 생각해 본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생각뿐이다.      
                                                                                                                (2010년 4월)
 

추천150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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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재욱님의 댓글

추재욱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수필의 한줄 한줄을 아름다운 세상의 풍경처럼 느끼며,

음미한다는 표현이 너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왠지 감동과 더불어 마음의 눈물샘이 자극되기도 하구요.
저는 반대로 정신없이 한 학기를 보내고 나니 제가 단순히 책과 내용을 바삐 길을 걸어가며
 가게 윈도우 진열대에 놓인 상품처럼 읽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교수님, 그저 면목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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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국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추재욱 교수,

바쁘다는 것, 그것이 젊음이라는 것이지.
좋은 것이야. 마음껏 누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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