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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TERARY WORKS


초원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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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나는 밤늦게 TV를 틀어 다이얼을 위성채널로 돌리다보니 한 곳에서 <草原의 빛>이라는 옛날 헐리웃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나는 우선 반가웠다. 오랜만에 보게 된 여우 나탈리 우드와 남우 워렌 비티의 젊고 청순한 얼굴을 보는 것만도 큰 즐거움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영화에 빠져들었다. 영화를 보면서 계산을 해보았다. 따져보니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1962년, 지금부터 정확하게 46년 전이었다. 나는 당시 22세의 영문과 2학년 학생이었다. 나는 그때 나의 첫사랑의 여인을 동반하고 있었다. 추억과 회고 속에서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희망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던 나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오래 전에 이미 한번 감동적으로 본적이 있는 영화를 다시 본다는 것은 한 때 크게 유행하였던 팝송을 당시 가수의 음성으로 다시 듣게 되는 경험과도 같이 특이한 경험이다. 이들은 잠시나마 우리를 이미 지나가 버린 그 옛날로 데리고 가 이런 영화나 노래에 연관된 추억이나 사건들을 상기시켜준다. 나는 나탈리 우드와 워렌 비티의 젊고 아름다운 모습에 재삼 감탄하면서, 이 영화에서 고등학교 학생으로 등장하였던 여우 나탈리 우드는 이미 사망하여 이 세상에 없고(43세의 한창 나이에 보트 사고로 익사함), 남우 워랜 비티는 죽었다는 소식이 아직 없는 것을 보면 살아 있음이 분명한데 그렇다 하더라도 그도 이미 70이 넘어 지금 나처럼 멍청한 늙은이가 되어있을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에  마음이 쓸쓸하였다. 늙으면 플라톤도 허수아비라 하지 않던가?

     내가 처음 <초원의 빛>을 보았을 때는 TV도 없었던 시대였다. 당시 극장에 가 영화를 본다는 것은 유일한 오락이었고 가장 얻기 쉬운 문화체험이었다. 서부활극을 비롯한 미국 헐리웃 영화들은 나의 상상력의 세계를 넓혀주고 사로잡았다.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나는 그 수많은 남녀 배우들의 이상스럽고 긴 이름들을 줄줄 외었으며, 이들의 액션과 패션들을 흉내 내고 모방하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거의 대부분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그중에서도 몇몇은 이런 저런 이유로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들도 있다. <초원의 빛>도 그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새로운 사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어차피 한번 이미 본 영화를 다시 한 번 또 보는 일이기에 나는 영화 내용을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영화나 다름없었다. 한 장면 장면이 새로웠고, 대사는 물론 영화의 진행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이 영화에 이런 장면이 있었던가? 이런 사건도 있었던가? 심지어 이 영화가 이렇게 끝나던가? 끝까지 예측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확실한 것은 이 영화를 옛날에 한 번 보았다는 사실 뿐이었다. 참 기억력처럼 믿을 수 없는 것도 없다. 특히 그것이 나이든 사람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나는 좋은 일 하는 하는 심 잡고 나의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을 위하여, 아니 이 영화를 이미 본 사람은 물론 아직 채 보지 못한 사람을 위하여, 이 영화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여 소개하기로 한다. 
 
     <초원의 빛>은 1920년대 미국 캔자스 주 어느 작은 시골마을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사춘기에 처한 두 젊은 남녀의 사랑과 성장에 관한 이야기다. 버드 스탬퍼(워렌 비티 역)와 윌마 디니(나탈리 우드 역)는 서로 만나 사랑에 빠진다. 두 젊은이는 곧 성에 눈을 뜨게 되며 지금까지 모르던 정신적 육체적 동요를 겪게 된다. 동시에 부모들의 편견과 요구, 사회적 제약과 계급의 차이에 직면한다. 상류계급에 속하는 버드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시골처녀 윌마 말고 이왕이면 “다른 종류의 여자”를 고르라고 충고하고, 윌마의 어머니는 딸에게 섹스는 순전히 아기를 낳기 위한 방편이라고 가르친다. 이 와중에서 윌마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버드는 아버지의 권고에 따라 마지못해 고향을 떠나 예일 대학에 입학함으로써 이들의 사랑은 끝난다. 1929년에 불어 닥친 경제공황은 주식시장의 폭락을 가져왔으며, 버드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몰락한다. 몇 년이 지난 후 둘이 다시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버드는 결혼하여 아기 하나를 둔 지극히 평범한 가장이 되어있었고,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윌마는 약혼자를 만나러 뉴욕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들은 서로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제각기 갈 길을 향하여 헤어진다.  삶의 슬픔, 시련과 고통을 통하여 인간은 성숙하고 지혜로워진다는 문학작품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주제가 이 영화에서도 아주 분명하고 명확하게 잘 부각되어 있다.  

     영문학, 영문학 가운데서도 시가 전공인 나에게 있어서 이 영화는 나를 사로잡는 아주 각별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영화에 아주 인상적이고도 효과적으로 영시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윌리엄 워드워즈의 이 시 구절은 처음에는 첫사랑의 환희와 심리적 불안 속에 빠진 윌마가 선생님의 지시에 의하여 교실에서 낭독되며, 두 번째로는 두 사람이 마지막 만나 헤어질 때 누군가에 의하여 자막과 함께 낭송된다. 이 시는 영문학도들에게는 비교적 잘 알려진 윌리엄 워드워즈의 “불멸의 시” 11개의 구절 가운데 10번째 구절로서 이 영화의 제목 <초원의 빛>도 이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만 하여도 이 시가 누구의 어떤 시인지, 제목이 무엇인지, 시의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보았지만 그저 그냥 멋있고 좋아보였으며, 나는 함께 영화를 본 전공이 다른 나의 애인에게 이 시에 대하여 애써 무엇을 아는 체 설명을 하느라 큰 고생을 하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간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여 꿈에 그리던 영문학 교수가 되어 바로 이 시를 수도 없이 읽었고, 학생들에게 가르쳤고, 한두 편의 학술논문도 쓴 나에게 있어서 이 시를 46년 만에 이 영화에서 또 마나게 되었다는 사실은 벅찬 감동이었고, 새로운 경험이었고, 큰 깨달음이었다.

     독자들이여, 내가 이 시를 여기에 이처럼 반복하여 소개하는 나를 너그럽게 이해하고 용서하여주시기를 바라노라. 나는 이 시가 참으로 좋은 시라는 것을, 진리라는 것을, 아름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확신하고 있다. 이렇게 좋은 것을 혼자 누린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간절한 심정에서 이 일을 하는 것이다. 특히 요즈음처럼 경제가 어렵고, 주가가 폭락하여 많은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리고 있는 이런 때, 사람들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걸핏하면 목숨을 끊는 일이 잦은 이런 시기에 우리는 더욱 더 이런 시를 읽어야만 한다. 경제학이 아니고 공부한 것이라고는 이것밖에 없는 나로서는 이렇게 해서라도 좋은 일 하고, 사람들을 위로하고 안심시키고 싶다. 시는, 좋은 시는, 삶에 큰 위로가 된다. 용기를 준다. 희망을 준다.

          “What though the radiance which was once so bright
           Be now forever taken from my sight,
           Though nothing can bring back the hour  
           Of splendor in the grass, or glory in the flower;
           We will grieve not, rather find
           Strength in what remains behind;
           In the primal sympathy
           Which having been must ever be;
           In the soothing thoughts that spring
           Out of human suffering;
           In the faith that looks through death,
           In years that bring the philosophic mind.”

          “한 때 그처럼 찬란했던 광휘는
          이제 너의 시야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하더라도,
          이제는 아무것도 초원의 빛을, 꽃의 영광을
          되돌려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슬퍼하지 말라.
          오히려 뒤에 남은 것 속에서,
          옛날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영원무궁한 태초의 인간본성 속에서,
          고통에서 샘물처럼 솟아나는 부드러운 추억 속에서,
          죽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신념 속에서,
          우리에게 철학적 지혜를 가져다주는 세월 속에서,
          힘과 위로를 얻으라.”

     영화가 끝났을 때는 이미 밤도 깊어 자정이 훨씬 지나 있었다. 나는 거실의 TV 앞에 혼자 앉아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처음 얼마동안 같이 보던 아내는 별로 흥미가 없었던지 이미 오래전에 자리를 뜨고 없었다. 나는 순간 외롭고 쓸쓸하다고 느꼈다. 나는 이내 좀 멋쩍은 생각에 빠졌다. 내가 만약 이 영화를 처음 같이 본 나의 첫사랑의 여자와 결혼을 했더라면 그 여자도 지금의 나의 아내처럼 나 혼자서 이 영화를 보도록 남겨두고 먼저 잠을 자러 들어갔을까?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나의 윌마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그때 그 여자를 볼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나는 그 여자와 함께 있으면 행복하고 자랑스러웠다. 한때 그 여자는 나의 전부였다. 당시 내가 그 여자 말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여자와 결혼하였으며 이 여인은 지금 남편이 이런 생각을 하며 적막한 거실에서 눈을 멀뚱멀뚱 뜨고 앉아있다는 사실은 아랑곳없이 태평스럽게 코까지 골면서 잠들어있다. 순간 나는 공연히 아내가 미워지고 나 자신에 화가 났다. 그러나 이내 나는 평소의 평온을 되찾았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제 노인이다. 별다른 희망이나 두려움도 없는 노인이다. 노인이 된다는 것도 한편으로는 큰 축복이다. 차가운 축복이다.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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