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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 선생님 일주기 추모식에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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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그 행사가 있은 지도 삼 개월이 지났다. 지난 5월 25일, 서울 근교 모란 공원묘지에 있는 한 조촐한 산소 앞에는 약 이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섰다. 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영문학자, 수필가, 시인으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고 피천득 선생님의 서거 일주기를 추모하는 모임이었다. 선생님은 바로 일 년 전 오늘 9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은 선생님의 강의를 들은 대학 제자들이거나, 선생님 생전 이런 저런 계기로 선생님과 아주 각별한 인연을 맺은 각계각층의 인사들이었다. 추모식은 선생님의 아드님으로 현대 아산병원에 근무하는 영아전문의 피수영 박사의 정성으로 이루어졌다.


이번 추모식에서는 선생님이 작고하시기 얼마 전 아마도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쓰신 “너”라는 제목의 시 한편이 새겨진 시비의 제막식도 있었다.

            너

     눈보라 헤치며
     날아와

     눈 쌓이는 가지에
     나래를 털고

     그저 얼마동안
     앉아 있다가

     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

     아득한 눈 속으로
     사라져 가는
     너
        
선생님의 자화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시는 외롭게 그러나 고고하게 한 세상을 살고 이  세상을 유감없이 하직하고 있는 선생님의  극명한 모습이다. 이 시비는 선생님의 옛 제자들에 의하여 봉헌되었으며, 영광스럽게 나도 이들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시비 제막식을 포함한 추모식이 끝난 뒤 모인 사람들은 공원묘지 경내 아름다운 잔디밭 위에서 베풀어 진 추모 만찬에 초대되었다. 식사가 있기 전 선생님과 각별한 인연이 있는 여류시인 한분과 제자들을 대표한 노 제자 한 분이 선생님을 추모하는 추도사를 했고, 아드님 피수영 박사의 답사가 있었으며, 이어 국내 유명한 피아니스트와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와 소프라노의 노래가 있었다. 선생님이 생전 그토록 좋아한 푸른 오월, 푸른 잔디 위에서 펼쳐진 야외음악회였다. 아들은 아버지가 무엇을 좋아하였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선생님의 영혼이 와 계셨다면 틀림없이 이처럼 생전에 자기가 좋아하였고 자기를 흠모한 사람들이 이처럼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것을 보고는 한없이 즐거워했을 것이다. 나는 마치 선생님이 아직도 살아계시어 잔디밭 어느 테이블에 앉아 이 가든파티를  마음껏 즐기고 계신 것처럼 느꼈다.

     추모식은 일생을 그 누구보다 잘 살고 가신 선생님에 대한 찬사와 축하의 분위기가 단연 지배적이었다. 우리는 모두 선생님이 아주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선생님은 장수를 누리셨고, 돌아가시기 불과 몇 시간 전까지도 정신이 아주 명료하였다. 선생님은 항상 선생님을 흠모하는 충직한 제자들과 수없이 많은 애독자들, 그리고 아주 절친한 소수의 친구들에 둘러싸여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무엇보다 유명했다. 우리나라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며, 선생님의 수필 한두 편을 읽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은 한번 읽은 그의 수필을 무척 좋아하고 오래 기억한다. 그의 수필집은 소리 없는 베스트셀러가 되어있다. 선생님은 자신도 모르게 국가적인 유명인사가 되어버렸으며, 그의 이름은 우리나라 문인들 가운데서는 가장 잘 알려진 유명 브랜드 가운데 하나가 되어버렸다. 
   
     나는 대학에 진학하여 영시 강의실에서 선생님을 처음 만난 후 선생님이 이 세상을 하직하는 날까지 선생님과 오랜 시간을 함께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린 소수의 사람들 가운데 한사람이다. 흑석동 중앙대학교에서 근무하였던 나는 퇴근 시 선생님이 사셨던 반포 아파트 24동 206호에 수시로 들릴 수가 있었다. 시간과 사정이 허락하는 한 나는 선생님에게 전화로 허락을 받고는 퇴근길에 선생님 댁에 들렸다. 선생님은 항상 산책 준비를 하신 채 나를 맞으셨고, 나는 선생님과 함께 날씨가 좋을 때는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공원 벤치에서, 아니면 반포 빠리 끄라쌍 제과점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항상 커피를, 선생님은 겨울엔 핫 초콜릿을 여름에는 키위 주스를 주문하셨다. 돈은 항상 선생님이 냈다. 내가 내는 것을 단 한 번도 허락한 일이 없었다. 선생님은 누구보다 이야기를 잘 하셨고, 나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셨다. 선생님은 내가 아는 것이 많고 이야기에 조리가 있다고 자주 칭찬을 해 주셨다. 그날의 데이트가 끝날 때가 되면 선생님은 으레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두서너 장 꺼내주면서 나의 집에 있는 아이들에게 가져다 줄 빵이나 과자를 사라고 하셨다. 사양해도 소용없었다. 조금 사면 또 조금 산다고 성화셨다. 빵 한보따리를 사서 한손에 들고 선생님과 함께 다시 아파트까지 걸어가 선생님이 댁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차를 운전하여 집에 돌아오곤 했다. 내가 선생님 댁에 들리는 날은 나나는 선생님이 쓰신 수필의 제목 “반사적 광영”을 실제로 누린 사람이다의 아이들이 맛있는 케이크를 먹는 날이었고, 또 그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이 쓰신 수필의 제목 “반사적 광영”을 실제로 누린 사람이다.  원체 유명한 사람이 자주 한곳에 가 창가의 같은 장소에 앉아 오래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제과점 지배인을 비롯하여 종업원들은 물론, 심지어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도 윈도우를 통하여 선생님을 알아보고는 인사를 했다. 지배인은 특별히 찾아와 선생님께 인사를 했고, 선생님 수필을 아주 좋아한다는 말도 했다. 손님들 가운데는 선생님을 알아보고는 다가와 자기를 소개하고는 사인을 받아가기도 했다. 심지어 근처에 살고 있다는 어떤 사람은 선생님이 창가에 앉아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제과점 안으로 들어와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는 집으로 달려가 카메라를 들고 다시 와 선생님과 함께 있는 사진을 찍는 일도 있었다. 선생님은 물론 옆에 앉아있는 나는 덩달아 신이 나고 어깨가 으쓱했다. . 선생님은 그 해 겨울 거동이 불편하시어 소파에 앉아 겨울을 보내시면서 나에게 새 봄이 오면 다시 공원에 산보도 하고 빠리 크라쌍에도 가자고 하셨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새 봄이 오자 선생님은 다사 돌아오지 못할 길을 영영 떠나시고 말았다.
   
     선생님은 여러 면에 있어서 남다른 데가 있었지만 결코 이상스럽다거나 괴상한 데는 없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선생님은 모든 면에 있어서 상식과 자연스러움을 중요시 하였다. 선생님은 이상스런 복장을 한다거나, 이상스럽게 수염을 기른다거나, 베레모를 쓴다거나 파이프를 항상 물고 다닌다거나 하는 사람들을 별로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부자연스럽다거나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을 싫어하셨다.

     선생님은 항상 혼자이셨지만 결코 외롭지는 않았다. 선생님은 언제 만나 뵈어도 명랑하셨다. 선생님은 심각하거나 엄숙한 얼굴을 한 적이 없었다. 적어도 나와 함께 계실 때는 그랬다. 나는 선생님이 어떤 일을 놓고 크게 고민하거나 낙담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선생님은 쉽게 잘 웃었다. 선생님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슬퍼한다거나, 비관적으로 바라본다거나, 원망한 적이 없다. 긴 안목으로 보아서 세상은 조금씩이나마 좋은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것이 선생님의 신념이었다. 선생님은 분명 낙천주의자요 낙관론자였다.

     선생님은 무엇보다 현실주의자요 휴머니스트였다. 그의 관심은 항상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었다. 지금이었고 여기였다. 그는 종교적이긴 하였지만 어떤 특정 종교를 신봉하지도 않았다. 그는 내세나 죽음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천국이나 지옥 같은 것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그는 형식적으로는 가톨릭으로 되어있었지만 성당에 나가 미사에 참석한다든가 교리이야기를 꺼내는 법은 없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행동하고, 자유롭게 믿는 사람이었다. 그가 임종하기 직전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마지막으로 그의 의사 아들에게 한 말은 “이젠 더 이상 안 되겠지?”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그는 실존주의자요 자유인이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강인하였으며 인간의 한계를 인정한 성자였다.

     그러나 그에게도 인간적인 약점이 있었다. 어디까지나 그는 명성을 추구하는 문인이었다. 수필가요 시인으로서 그는 이 나라에서 그 어느 누구보다도 큰 명성을 얻었고 누린 사람이었지만 그는 더 많은 그리고 더 큰 명성을 원했다. 그는 누구보다 지혜롭고 현명하여 이 명성이라는 것이 부질없고, 위험하고, 허망한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존 밀턴이 젊어서 죽은 그의 친구를 애도하는 시 “리시다스”에서 말한 “고귀한 사람의 마지막 약점”인 이 명성엔 결코 무관심할 수도 초연할 수도 없었다. 그에게도 역시 초월할 수 없는 인간적인 약점과 욕망이 있었다. 이런 면에서 그는 또한 지극히 평범한 한 인간이었다.

     지난주 수요일 나는 선생님이 살고 계시던 반포 아파트에 들렀다. 선생님이 타계하신 후 두 번째였다. 이곳에는 90세 되시는 선생님의 사모님이 아직 살고 계신다. 사모님은 선생님이 정정하게 살아계실 때부터 노환으로 간병인 아주머니의 보호를 받고 계신다. 나와는 오랜 구면인 간병인 아주머니는 항상 그랬듯이 나를 노인이 누워계신 방으로 안내하였다. 아주머니는 눈을 감고 누워있는 노인을 깨워 내가 왔음을 알리고 잠시 일으켜 자리에 앉도록 하고는 나의 인사말에 어떤 답례를 하도록 유도하였다. 노인은 그런대로 연약한 의사표시를 하였다.

     인사가 끝나고 거실 소파에 앉은 나에게 아주머니는 차를 한잔 가져왔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려니 했지만 그동안 일 년 사이에 모든 것이 너무나 변해 있었다. 선생님이 쓰시던 서재는 텅 비어 썰렁했다. 선생님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 눈에 익은 낡은 책상과 걸상들, 서가에 꽂혀있던 오래된 영문학에 관련된 책들, 서가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로버트 프로스트를 위시한 생전 선생님이 좋아하셨던 영미시인들의 사진이 담긴 조그만 액자들,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의 사진이 든 액자, 그리고 선물로 받아 벽에 기대어 놓고 보셨던  크고 작은 액자들 - 이 모든 것들이 단 하나도 있던 자리에 없었다. 모두가 잠실 롯데 백화점 3층 민속관에 새로 생긴 선생님 기념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처럼 귀찮을 정도로 쉴 사이 없이 울리던 전화기의 벨 소리도 이제는 울리지 않아 이따금 복덕방에서 걸려오는 부동산 중개인의 전화도 반가울 지경이라는 간병인 아주머니의 말이다.

     사람이 죽으면 사람만 죽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생전 지구의 한 구석 한 모퉁이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차지하던 장소와 그 속에서 사용하고, 사랑하고, 쓰다듬고, 만지고 하던 모든 것들이 그와 함께 없어지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곳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다. 우리는 설마 하지만 그 설마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을 나는 오늘 여기서 똑똑히 보았다. 내가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나마 오늘 나를 맞아준 사모님도 떠날 것이고, 구면의 간병인 아주머니도 떠날 것이다. 이 아파트도 어느 이름 모를 낯선 사람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선생님이 쓰시던 손때 묻은 물건들은 선생님의 기념관에 가면 다시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어찌 살아 숨 쉬던 선생님이 계시던 이 공간에 있던 물건들과 같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선생님의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 그만의 독특한 미소, 웃음소리, 그리고 나의 손을 잡아주던 따뜻한 손길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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