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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TERARY WORKS


파티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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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매주 일요일에 있는 등산모임에 가능하면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모임은 현역에서 은퇴한 일곱 명의 대학 동창으로 구성되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구성원이 아홉이었는데 삼 년 전에 한 사람이 세상을 먼저 떠났고, 또 한 사람은 작년부터 몸이 불편하여 참석을 못하고 있다. 등산이란 원래 대단한 경험과 기술, 그리고 체력이 요구되는 힘들고 위험한 스포츠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매주 하는 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등산은 아니고, 글자 그대로 일종의 산행이다. 즉 정기적으로 모여 서울 근교의 산에 올라가 가지고 간 음식을 먹고 떠들고 웃다가 내려오는 일종의 피크닉이다. 우리만 그런가 하고 살펴보니 우리 나이의 사람들은 대개가 그렇다.


     지금은 이 모양이 되었지만 나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진지한 등산가요 산악인이었다. 에베레스트나 맥킨리 산과 같이 외국에 있는 유명한 산을 등정하지는 못하였으나, 그래도 백두산을 빼고는 국내의 유명하고 높다는 산은 거의 다 올라 보았다. 숨이 차 헐떡이는 것은 그저 고통스런 즐거움이었다. 어떤 이유로 정상을 밟지 않고 하산한다는 것은 크게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매번 기진맥진하여 집에 돌아왔지만 한 밤만 자고 나면 더 멀리, 더 높은 곳에 가고싶은 욕망과 에너지로 몸이 근질근질했다. 그때는 혼자 다녀도 외로움이란 것을 몰랐다. 혼자가 오히려 더 좋았다. 깊은 산 속에서 혼자만 맛볼 수 있는 그 특별한 고독함을 나는 사랑했다. 고통스런 신체적인 투쟁 끝에 높은 산의 정상에 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의 경험은 참으로 특별한 것이었다. 나는 어째서 예수가 그의 그 유명한 〈산상수훈〉이란 설교를 산 위에서 했는지를 알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제 옛날의 일이다. 나는 이제 등산가나 산악인이 아니다. 그저 즐거운 마음으로 친구들과 어울려 산에 가기를 좋아하는 사람일뿐이다. 가다가 넓적한 바위나 나무 밑에 있는 평평한 평지만 보면 더 올라가지 말고 앉아 쉬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이제는 혼자 산에 가는 일은 별로 없다. 함께 있어줄 친구가 필요하다. 거친 호흡이 가져다주던 그 고통스럽던 즐거움은 이제는 고통일 뿐이다. 깊은 산 속에서 혼자서 맛보던 그 고독도 옛날의 그 맛이 아니다. 확실히 나이는 사람의 호불호를 바꾸어 놓는다.

     또 일요일이 다가온다. 어김없이 P 대장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표면적으로는 이번에 갈 산 이름과 집합시간, 그리고 집합장소를 상기시켜주기 위함이지만, 진짜 이유는 대원들의 출석을 미리 체크하기 위함이다. P 대장은 산행에 관한 한 대단히 열성적인 만큼 독선적이며 또한 권위적이다. 자기가 하자는 대로 따르지 않고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하거나 고집을 부리면 성도 잘 내고 삐치기도 잘한다. 그가 쉬자면 쉬어야 하고, 가자면 가야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P 대장의 권위와 자존심에 큰 상처와 타격을 주는 일은 대원의 불참이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우리 대원들은 그에게 불참을 통고하기란 참으로 적지 않은 고통이다. 나는 대장에게 이번 일요일 산행에 꼭 참석할 것을 약속한다. 나의 확답에 어린애처럼 기뻐하는 P 대장의 얼굴이 보지 않아도 보는 듯하다.

     나의 출석을 확인한 대장의 목소리가 갑자기 부드러워진다. 우리는 매번 산행을 할 때마다 이제 우리 나이에 중요한 것은 돈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오직 건강뿐이다; 그러니 이 건강을 지키는데 우리 관심과 노력의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것을 지키고 유지하고 증진하는 데는 뭐니뭐니 해도 등산이 제일이다; 그러니까 주말 등산모임에는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꼭 나와야만 한다고 집단적으로 거듭 맹세하고 다짐하지만, 실제로 모이고 보면 개인적으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언제나 한 두 사람의 불참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 대장에게는 이 결석자가 생긴다는 것이 마치 자기의 리더쉽의 부족으로 생각되는지, 아니면 자기의 리더쉽에 대한 무시 내지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지금까지 대원들이 결석을 통고할 때마다 대원들이 말을 안 들어 대장 노릇 “못해먹겠다”는 말을 열 번, 아니 스무 번도 더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대장은 내가 참석을 약속하고서도 마지막 순간에 불참을 통고하는 과거의 전력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나의 출석 확인을 하고 나서도 전화를 끊지 않고 이번에는 명령보다 더 무서운 유혹을 던진다. 그는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이번 산행에는 프랑스 산 고급 꼬냑이 한 병 있다는 것만 알고있으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는다. 우리는 산에 갈 때면 누군가 으레 등산 백 속에 막걸리나 소주와 같은 알콜 성분이 들어있는 음료를 넣어 가지고 다닌다. 가끔 외제 위스키도 가져온다. 그런데 프랑스 산 고급 꼬냑이라면 이건 분명 보통 일이 아니다. 술을 크게 즐기지 못하는 나에게도 평범한 유혹이 아니다.

     대장은 그 꼬냑을 가져오는 친구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게 누구인지 짐작이 간다. 지난 두 주일동안 부인과 함께 해외여행을 하고 돌아온 S임에 틀림없다. 그는 혼자서(아니 마누라와 함께) 그런 좋은 시간을 가졌으니, 동시에 여행 때문에 두 번이나 연속으로 불참을 하였으니, 대장의 분노와 대원들의 질투심에서 나온 비난을 어떻게 해서든지 진정시키고 완화시킬 방도를 강구하였을 것이다. 과거에도 누군가가 바로 이런 방법으로 그의 지은 죄를 씻은 적이 있었다. 아니다. 이 S라는 친구는 본시 마음이 선량하고 인정이 많은 착한 사람이다. 틀림없이 그는 야자수가 늘어선 시원한 하와이 해변을 마누라와 손을 잡고 걸으면서, 같은 시간 고국에서 용광로 같은 여름을 나느라고 죽을 고생을 하고있는 친구들이 불쌍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귀국 길 기내에서 우리 모두를 생각하고 거금을 들여 그 귀한 술을 한 병 샀을 것이다.

     어쨌든 이번 산행은 흥겨운 파티가 될 것이 틀림없다. 채 맛보지도 않은 꼬냑의 향기에 벌써 코끝이 짜르르하다. 마개는 자기가 따야한다느니, 처음 맛은 자기가 꼭 보아야만 한다느니, 이런 술은 이런 방법으로 마셔야만 한다느니 등등, 꼬냑 한 병을 놓고 벌어질 대원들 간의 승강이가 눈에 선하다. 술기운에 기고만장하는 대원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특히 술을 좋아하는,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지나치게 좋아하는 M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가 꼬냑 한 모금을 목구멍 아래로 천천히 흘려보내면서 지을 얼굴 표정이 눈에 선하고 다 넘긴 다음 처음 토해낼 그 환희의 감탄사가 들리는 듯 하다.

     꼬냑이 있었던 지난주 일요일 등산모임에는 대원 전원이 참석하는 성황을 이루어 오랜만에 대장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대장의 그 행복도 정작 그 귀중한 꼬냑의 마개를 따는 순간 사라지고 말았다. M이 마시기를 거절하였기 때문이었다. M이, 우리 산행의 분위기를 고조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M이, 술이라고 하면 사양을 모르는 M이, 다른 종류의 술도 아닌 꼬냑을, 단 한 모금도 마시기를 거절한 것이었다. 그는 애써 평상시의 쾌활함을 유지하면서 자기는 위장에 이상이 생겨 2주일 후 수술을 받게 되었다고 술을 권하는 친구들에게 이해를  구하였다. 처음에는 아무도 이 친구의 말을 믿으려들지 않았다. 예전에도 그가 자주 그랬듯이 보나마나 전 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아직 그 후유증으로 속이 불편한 정도로 알았다. 그러나 이 친구의 얼굴과 목소리에서 이 친구 특유의 그 명랑성과 활기가 살아지고 없다는 사실이 사태의 심각성을 우리모두에게 순간적으로 일깨워 주었다. 아무도 그것이 어떤 수술이냐고 감히 자세히 묻지도 못하였다. 우리는 애써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예전처럼 크게 웃고 떠들려고 애를 썼지만 모두가 공허하고 헛된 일이었다.

     우리는 대충 파티를 끝내고 산을 내려왔다. 산을 내려오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려하지 않았다. 제각기 제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 화려하던 여름은 어느새 쓸쓸한 가을에 자리를 비켜주고 있었다. 우리는 산을 내려와서 으레 하게 되어있는 나머지 스케줄은 생략하고 모두 헤어져 집으로 곧장 돌아갔다. 그날은 다음 등산에 대한 P대장의 어떤 언급도 없었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그 날 따라 산행을 한 후 언제고 그렇게 쉽게 찾아오던 잠도 오지 않았다. 나는 혼자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M이 등산에 나오지 않아도 산행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임은 지금까지의 그 흥겹고 재미있는 그런 모임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M이 당분간은, 아니 어쩌면 영구히 술을 입에 대려고 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M이 술을 마시지 않아 맹숭맹숭하고, 그의 하늘을 찌를듯하던 기백이 없는 상태에서 우리가 매주 그와 함께 누렸던 그 자유분방하고 거리낌없었던 이야기와 산골짜기를 뒤흔들던 웃음소리는 이제 없어질 것이 분명했다. 과연 우리의 파티는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인가? 이렇게 우리는 때가 오면 사랑도, 계절도, 생명도 별 수 없이 끝나고 만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이처럼 말없이 순순히 고개 숙여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인가? 감고있는 나의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하루 일에 지친 아내는 오늘따라 코까지 골면서 자고 있었다.  
      (2005년 9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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