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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TERARY WORKS


어느 할아버지의 블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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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년퇴직한 내가 요즈음 집에서 맡아하는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는 여섯 살 먹은 손자를 돌보는 일이다. 자식을 돌보는 일이야 마땅히 어미와 아비가 담당해야만 하는 일이지만 요즈음 어미들은 직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면서도 공 없는 그 일이 할머니의 몫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아주 많다. 나의 시집 간 딸도 아침 일찍 출근을 하기 때문에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의 양육은 당분간 전적으로 할머니 - 다시 말해서 나의 아내의 몫이 되어버렸으며, 나 또한 아내가 이런 저런 이유로 불가피하게 자리를 비워야만 할 경우에는 그 자리를 메워야만 할 처지에 있다.
  
     사실 나에게 할당된 일이란 일이라기보다 하나의 과정에 불과하다. 손자의 그 날 스케줄에 따라 행동하면 그만이다. 유치원에서 운영하는 버스의 시간에 맞춰 지정된 시간, 지정된 장소에 나가 손자를 태워 보내거나 맞이하여 집으로 데려와 할머니나 자기 어미가 돌아올 때까지 같이 있어주면 된다. 아비는? 아비는 어미보다 항상 더 일찍 출근해서 밤늦게 집에 돌아온다.

     내가 이렇게 말하니까 손자를 돌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 일이 간단하고 쉬워 보일런지도 모르겠지만 정작 이 일을 조금이라도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이 일이 생각보다는 힘들고, 복잡하고, 민감한 일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다. 생각 보다 훨씬 고되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이 일은 정신적, 육체적, 능력과 정서적 안정성을 요구하며, 무엇보다 인내심과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임무가 부여된 날 나는 아침 일찍부터 바짝 긴장한다. 친구와 점심 약속이나 저녁 약속은 모두 취소다. 출발하고 도착하는 유치원 버스시간을 숙지하여 머릿속에 기억해야만 하고,  손자 아이의 당일 스케줄 - 유치원 이외에 태권도, 미술학원 , 피아노 레슨 등의 시간을 잊거나 혼동해서도 안 된다. 그동안 나는 건망증으로 인하여 두서너 번 임무태만의 범죄를 저질렀으며, 그때마다 나는 그의 할머니 - 그러니까 나의 아내와 그의 어미 - 그러니까 나의 딸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았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나의 쇠퇴해가는 기억력과 부족한 사명감을 개탄하였으며, 귀한 손자를 돌볼 수 있는 특권을 박탈하겠다는 으름장을 놓기도 하였다. 이럴 때마다 나는 내가 저지른 용서받지 못할 과실에 대하여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면서 용서를 구했으며, 결코 이런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다짐을 하였으며, 앞으로는 더욱 더 임무에 충실하겠노라고 맹세하였다. 이들은 크게 자비라도 베푸는 듯이 나를 용서해 주었다.

     이들의 주장과 우려에도 충분한 이유가 있다. 내가 만약 지정된 시간과 장소에 나가 기다리지 않아 어린 손자가 혼자 길거리를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실종된다거나, 괴한에게 납치된다거나, 차에 친다거나 하는 일이 발생하면 어찌하겠느냐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지금 아담과 이브가 살았던 에덴동산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대도시 서울에서 살고 있다. 특히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들에게는 더욱 더 그렇다. 그저 만사에 주의와 조심, 그리고 경계가 제일이다.

     일단 손자를 집에 데리고 들어오면 그날 임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완료한 셈이다. 나는 소파에 느긋이 기대 누워 TV를 켜 내가 좋아하는 프로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그게 나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손자는 어른인 내가 보아도 비싸 보이고 신기한 장난감이 무진장으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거들떠보지 않고 나에게 자기와 함께 놀아주기를 요구한다. 나는 짜증이 나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요구에 기꺼이 응하는 체 한다. 손자는 외아들이다. 같이 놀 형제나 자매가 없다. 밖에 나가도 함께 놀 친구들도 없다. 결국 이 큰 아파트에 덩 그라니 나와 손자 둘 뿐이다. 손자의 처지가 좀 안쓰럽기도 하다.

     손자는 생판 처음 들어보는 카드게임을 하자고 조른다. 할 줄 모른다고 발뺌을 하면 가르쳐줄테니 하자고 한다. 하기 싫지만 따라 하는 수밖에. 이때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일은 너무 일방적으로 져주거나 이기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녀석은 아주 영리하여 너무 쉽게 져주면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하여 화를 내고, 너무 일방적으로 이겨도 심사가 고약해져 심술을 부린다. 게임에서  연달아 패하여 심사가 뒤틀리게 되면 엉뚱한 시비를 걸기도 한다. 서로  보아주기로 합의한 지난주 있었던 일을 자기 어미에게 일러바치겠다는 것이다. 사실 그런 일이 있기는 있었다. 나는 TV에서 중계하는 유로 2008 축구 준결승전을 보기 위하여 손자에게는 어미로부터 엄격히 금지된 전자 오락기구인 닌텐도를 무려 두 시간이나 하도록 내버려 둔 적이 있다.  나는 손자 녀석의 위협에 굴복하여 이놈의 비위를 맞추기로 한다. 어떻던 좋지 않은 이야기가 저의 어미의 귀에 들어가면 나의 변명은 통할 리가 없고 또 한바탕 소란이 벌어질 터이니까. 이래저래 할아버지는 슬프다.

     아파트 내에서 할 수 있는 게임이나 놀이에 싫증이 난 손자는 밖에 나가 놀고 싶다고 한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는다. 나는 손자가 자전거를 타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자전거다. 녀석은 최근 뒷바퀴에 조그만 보조바퀴가 달려 옆으로 넘어질 염려가 없는 자전거에서 보조바퀴를 떼어냈다. 이 이륜 자전거는 속도가 엄청나며 어느 때고 옆으로 쓰러지기 쉽기 때문에 어떤 사고가 날지 아무도 모른다. 누구와 충돌할 수도 있고, 쓸어져 다칠 수도 있으며, 피가 날 수도 있다. 자전거를 타다가 만약에 쓰러지기라도 하여 팔꿈치나 정강이에서 피라도 나는 날에는 세상의 끝이다. 모든 책임은 이 할아버지에게 떨어진다. 어떻게 아이를 돌보았기에 이 지경을 만들었냐고 책임 추궁이 추상같다. 넘어진 손자의 잘 못은 전혀 없고 책임은 고스란히 이 늙은 할아버지 몫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선의 방법은 녀석이 자전거 위에 올라 앉아 있는 동안에는 한시도 자전거에서 손을 떼어서는 안 된다. 붙잡고 있어야만 한다. 달릴 때도 마찬가지다. 노쇠한 나의 다리와 심장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자전거 꽁무니를 꼭 잡고 함께 달려야만 한다.  

     나는 손자에게 자전거 타기 대신 그네, 미끄럼틀, 목마, 씨소, 정글짐 등 다양한 놀이기구들이 있는 아파트 근처 놀이터에 가서 노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슬쩍 제안해 의외로 성공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 영리한 손자는 내가 달리는 자전거의 꽁무니를 붙잡고 달리기에는 너무 늙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는 큰맘 먹고 나를 봐주는 것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쉰다. 놀이터에 가면 무엇보다 또래의 아이들이 많기 때문에 내가 거들어 주지 않아도 아이들과 어울려 잘 논다. 나는 놀이터 근처의 벤치에 앉아 놀이터의 풍속도를 감상하면서 아이들과 뒤섞여 놀기에 여념이 없는 손자에게 가끔 시선을 주어 소재를 확인만 하면 된다.

     벤치에 앉아 아이들이 즐겁게 뛰노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어느덧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나 자신을 생각하며 자못 심각한 명상에 잠긴다. 어째서 나는 이 고마움을 모르고, 나의 사랑에 무관심하고, 아주 냉정하고, 자기 고집만 내세우는 이 손자라는 존재 앞에서 이다지도 부드럽고, 너그러우며, 참기 잘하고, 연약하고, 겁을 내고, 벌벌 하고, 굽실거리고, 아첨도 하는 존재가 되었단 말인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나의 자식들에게는 이렇지 않았다. 물론 자식들을 끔찍이 사랑했지만 자식들에게 나는 쉽게 화도 냈고 야단도 쳤다. 나의 자식들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사랑은 다분히 교육적이었고, 이성적이었고, 상대적인 것이었다고 한다면, 현재 할아버지로서 나의 손자에 대한 사랑은 가히 비교육적이고, 맹목적이고, 일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모를 일이다.

     나의 벤치 위에서의 명상은 날개를 펴 날아가 나 자신이 손자였던 시간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나도 한때는 손자였다. 나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왜냐하면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손자로서의 나의 기억은 오직 할머니에 대한 것뿐이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할머니는 이미 백발의 머리에 허리는 몹시 굽었었고, 이도 몇 개 빠지고 없었다. 걸음을 옮길 때는 언제나 지팡이에 의존하셨다. 주변을 둘러보니 손자나 손녀를 데리고 나온 현대식 할머니들도 여럿 눈에 들어온다. 하나같이 정정하고, 건강해 보이고, 좋은 옷을 입고 있다.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 같은 분은 아무리 보아도 없다.  

     별안간 누추한 옷을 입고 힘들여 걸음을 옮기셨던 그 할머니가 보고 싶다. 그 할머니도 손자였던 나를 내가 지금 나의 손자를 사랑하듯이 본능적으로, 맹목적으로, 일방적으로 사랑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할머니의 그 사랑은 나로부터 아무런 보상이나 보답을 받지 못하고 지나가버렸다. 나는 할머니에게 고맙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 한 기억이 없다. 오히려 할머니의 하얀 머리와 굽은 허리를 보고 웃었으며, 할머니를 싫어하였으며, 할머니가 닥아 오면 피했다. 나의 눈에는 오직 엄마와 아빠뿐이었고 할머니는 안중에 없었다. 어린 나의 눈에도 할머니는 한 지붕 밑에서 함께 살기는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하나의 거추장스런 존재였다. 이제 와서야 비로소 나는 당시 가난했던 집안에서 나의 할머니가 처했던 그 어려움과 외로움, 그리고 소외감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슴이 아프고 눈에 눈물이 고인다. 소녀가 자라나 할머니가 된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와 같은 사람이 따로 있는 줄로 나는 알았다. 할머니에 대한 그런 무지와 배은에 대한 벌을 지금에 와서 나는 나의 여섯 살 먹은 손자로부터 톡톡히 받고 있나보다. 그래도 싸다.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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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태기님의 댓글

홍태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이교수님,

저는 포항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교사 홍태기라고 합니다.
 최근에 인터넷상에서 코리아타임지를 읽다가 교수님께서 쓰신 A Grandfather's Blues 를 읽게 되었습니다.
너무 감명을 받아서 인터넷 상에서 검색을 해서 교수님의 다른 글들을 바로 "Ideas & Ideals"에서 찾을 수
있었고 또 교보문고에서 교수님의 수필집을 구입하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영어학습에 교수님의 수필을 한번 사용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염치 불문하고 이렇게 메일을 보냅니다.
혹시 "화살과 노래"에 실린 글들의 영문수필을 구해볼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안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절대로 다른 용도로는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초면에 이런 실례의 글을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일찍 찾아온 초여름 더위에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포항에서 홍태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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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태기님의 댓글

홍태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이교수님,

답장 잘 받았습니다. 교수님의 수필을 이렇게 많이 접할 수 있게 되어 정말 다행입니다.
영어교육의 원로로서 앞으로 학생지도시에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메일로 문의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 변화를 주어야 하는,
아니 저희 영어교사들로 하여금 더 많은 변화를 요구하는 이 시대의 흐름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평소에 수업전반부에 신문활용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신문이야말로 살아있는 영어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보고 국내외 신문을 망라해서 좋은 글감을 그날 그날 찾아서 수업에 이용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교수님의 수필 중에서 좋은 부분을 발췌해서 한번 수업에도 이용해 볼까 구상중입니다.
교수님께서는 수필작업을 하실때 영문을 먼저 작성하시는지 아니면 한글작품으로 먼저 쓰시는지 제 나름대로 궁금해서 이렇게 말미에 여쭙니다.
다시한번 저의 메일에 답장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최근에 작고한 미국 NBC " Meet the Press"프로그램의 Tim Russert이 자주 인용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No exercise is better for the human heart than reaching down to help another human being."

포항에서 홍태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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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령님의 댓글

홍문령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글 잘 읽었습니다.
Korea times에 들러서 Opinion을 아무생각없이 눌렀는데 A Grandfather's Blues라는 제목의 글이 보이길래 쭉 읽어보았어요.
전체적으로는 글이 길면서도 인상깊고 분위기가 슬프기도 하고 해서 좋게 잘 읽었어요..
하지만 마지막부분에서 지금 상황이 할머니를 무시하고 그런 걸로 인해 벌을 받고 있다고 하셨는데,
손자를 보살피는 것을 벌로 생각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애 보살피는 것 굉장히 골치아프죠. 이렇게 하면 안되고 저렇게 하면 안되고...
그렇지만 그쪽의 손자인데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살피는 것도 축복이라고 생각하셔야지,
그걸 벌이라고 안좋게만 생각하시면 가뜩이나 까다로운 job인데 더 싫어지고 그러지 않을까요..?
지금 손자를 할머니께서 그쪽을 사랑하면서 보살펴주셨듯이
사랑으로 자랑스러하시면서 보살피시는 것이 더 좋을것 같네요
그쪽 상황을 제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제 주제에 이런 의견을 보내는게 우습지만,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이라서 이렇게 짧게 보내내요..^^
기분이 나쁘셨다면 죄송하구요, 그래도 제 진심이니 봐주시구요 ㅎㅎㅎ
그럼 안녕히 계시고, 좋은하루 되십시오.. 2009-02-24

애독자 홍문령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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