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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TERARY WORKS


더 늙기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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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년퇴직 한지 2년이 지난 전직 영문학 교수로서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재직 시 읽어야지 하면서도 이런 저런 이유로 읽지 못했던 작품들을 찾아 읽거나, 이미 읽었거나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친 작품들을 한가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천천히 읽어보는 일이다. 이제는 어떤 것을 가르쳐야한다던가 승진에 필요한 논문을 써야한다던가 하는 의무도 없기 때문에 무엇을 읽던 읽기 시작한 작품을 끝까지 읽을 필요도 없고, 내용을 기억하거나 간단하게 요약할 필요도 없고, 일정한 시간 내에 읽기를 끝마쳐야만 된다는 어떤 의무감도 없다. 기억력이 나빠저 이제는 읽고 나면 무엇을 읽었는지 즉시 잊어버린다. 그래도 괘념하지 않는다. 그냥 혼자 웃어넘긴다.

     이제 나는 순전히 나 자신만의 즐거움을 위하여 그리고 읽는 순간의 즐거움 때문에 책을 읽는다. 읽는 도중 뛰어난 표현이나 특별히 감동적인 구절을 접하게 되면 아름다운 경치 앞에 서게 된 사람이 한동안 자리에 서서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경치를 마음껏 감상하듯이 나도 더 나가기를 중지하고 그 부분을 여러 번 읽고 오래 음미한다. 전에는 그렇지 못했다. 항상 무엇에 쫓기듯이 앞으로 나가야만 했다. 읽다가 나의 기분에 따라 읽던 것을 도중에 중지하고 다른 작품으로 옮겨가는 변덕을 부리기도 한다. 내 맘 대로다.

     문제는 읽고 싶은 좋은 작품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영문학의 세계는 그 속에 각종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한 거대한 정원과도 같다. 나는 이런 꽃밭 위를 날면서 꿀을 모으는 꿀벌이 어느 꽃에 앉을 것인가를 놓고 잠시 주저하듯이 다음엔 어떤 작품을 읽을 것인가를 놓고 잠시 망설인다. 욕심 같아서는 다 읽고 싶지만 나이를 생각하고는 그런 욕심을 즉시 포기한다. 시력의 감퇴를 감지하면서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는 때가 올 날도 멀지 않았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사뭇 심각해진다. 이럴 때마다 나는 더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나그네가 발걸음을 재촉하듯이, 더 늦기 전에 하나라도 더 읽어야지 하는 욕심에 공연히 마음만 더 조급해진다. 그럴 이유나 필요가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오늘 아침 나는 무심코 서가에서 두꺼운 책 한권을 꺼냈다.『셰익스피어 전집』이었다. 이 책을 마지막으로 펼쳐본지도 어느덧 몇 년이 흘렀다. 한동안 잊고 지났던 친구를 때 아닌 장소에서 만난 듯이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우선 여기 저기 몇 장 넘겨보았다. 붉은 볼펜으로 그어진 밑줄들이 무수히 눈에 띄었다. 모두가 내가 남겨놓은 젊은 날의 흔적이었다.

     이 두툼한 책을 앞에 놓고 나는 영문학이라는 미지의 세계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던 대학 입학시절을 회상해 보았다. 막연하나마 나는 대단히 무모할 정도로 야심적이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별수 없는 영어실력을 가지고 나는 곧바로 유명한 영문학 작품들을 읽으려고 대어들었다. 당연히 나는 영문학이라는 깊고도 높은 수준 앞에서 말할 수 없는 좌절감과 회의를 맛보아야만 했다. 영문학을 포기하고 다른 공부를 해야만 하겠다는 생각도 심각하게 여러 번 해보았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같은 해 영문과에 입학한 다른 친구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알프스 산과도 같이 높고 태평양 보다 넓어 보이는 영문학이란 가늠할 수 없는 대상 앞에서 우리는 누구나 기가 죽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나의 입학 동기생들 가운데 대부분이 졸업을 전후하여 전공을 영문학에서 좀 더 실용적인 학문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누가 뭐래도 영문학뿐이었다. 이런 미련스런 고집 덕분에 나는 영문학 교수가 되어 내가 좋아하는 글을 읽고 가르치면서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간을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난 지금도 나는 이『셰익스피어 전집』을 내가 처음 구입하였을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내가 대학에 입학하였던 1960년 여름이었다. 나는 당시 광화문에 있었던 양서 전문서점 범문사에 들렸다. 외화사용이 지금처럼 쉽지 않았던 당시 이 서점은 서울에서 아마도 영문학 관계의 서적을 수입하여 판매하였던 유일한 서점이었다. 이곳에는 각종 영문학 서적들이 마치 금은 보석상에 각종  보석들이 자태를 뽐내듯이 진열되어 있었다. 양서들은 그 질이나 표지 디자인에서부터 당시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책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품위가 있어 보였다. 이 탐나는 양서들 가운데 이 전집이 놓여 있었다. 가격은 당시 나의 주머니 사정으로는 엄두도 낼 수 없이 높은 가격이었다. 이보다 더 높은 것은 당시 나의 영어실력을 가지고는 감히 부끄러워 넘보기조차 어려운 작품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후 몇 번이나 서점을 더 방문하고 오래 망설인 끝에 드디어 어느 날 이 책을 사 가지고 집에 돌아왔다.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면서 나는 무슨 큰일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흥분해 있었다. 지금도 그 때 두 손에 느꼈던 이 책의 무게를 잊을 수 없다. 그것은 분명 하나의 큰 투자요 또 모험이었다. 그리고 내 인생의 작은 승리였다.

     이 책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모험은 그 후 내가 영문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찾아왔다. 이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부피가 큰 전집은 항상 나의 곁에 있었으며, 나는 틈틈이 이 책 가운데서 필요한 작품만을 골라 필요에 따라 몇 개를 읽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방학이 시작되는 때 나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 전집 속에 들어 있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아주 착실하게 집중적으로 모두 독파하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겨울방학까지만 부지런히 읽으면 모두 끝마칠 것으로 알았던 이 계획은 결국  몇 해가 걸렸다. 총 37편의 희곡작품은 물론, 154편의 소네트와 그가 남긴 5편의 장시 - 매 작품에 따른 해설 및 주석 등 이 책 속에 들어있는 단어는 단 한자도 나의 시선이 닿지 않고 지나간 것은 없었다.

     이것은 누기 뭐라 해도 나의 인생 가운데 내가 이룩한 업적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이 업적을 크게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몇 년 전 관광여행 차 영국에 가 스트래트포드 에이본에 있는 셰익스피어의 생가를 방문하였을 때 나는 이곳을 찾아온 수많은 관광객들 사이에서 혼자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셰익스피어 작품을 나처럼 몽땅 읽어 본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고 해!

     그런데 이런 나의 셰익스피어 작품 완독이라는 좀 미련한 작업이 소리 없이 진행되는 가운데 나는 또 다른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작품 읽기가 끝나면 이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셰익스피어 연구사에 길이 남을 그런 비평서를 하나 저술하여 내 이름을 길이 후세에 남겨보겠다는 야무진 꿈이었다. 당시 나의 나이나 의욕으로 보아 못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당찬 나의 계획은 실제에 있어서는 아무런 진척을 보지 못하고 나의 머릿속에서만 맴돌다가 결국은 나의 퇴직과 함께 물거품이 되었다. 지금이라도 한번 달려들어 해볼까 하다가도 아니지, 이제는 때가 아니지, 하면서 나 스스로를 달랜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나보다. 아 슬픈 욕망이여!  

     결국 남아 있는 것은 이 책과 이 책 곳곳에 남겨놓은 나의 필적들, 그리고 중요한 곳에 그어놓은 무수한 밑줄들. 나는 이런 흔적들을 바라보면서 회상에 잠겼다. 이런 일을 했던 때가 까마득히 먼 옛날의 일로 생각되었다. 당시의 그 기백과 용기, 야망, 정열은 이제 모두 어리로 갔단 말인가? 이 흔적들은 나의 젊은 시절의 야망과 부질없는 노력의 시신처럼 보였다. 나는 이것들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대견하기도 하였고, 허망하기도 하였고, 동시에 부끄럽기도 하였다.  

     나의 시선이 붉은 밑줄이 그어진 비교적 긴 문단 위에 머물렀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좋을 대로 하세요>(As You Like It) 2막 7장에 나오는 비교적 잘 알려진 독백(獨白)이었다. “세상은 연극무대, 우리는 모두 그 위에서 춤추는 배우”로 시작되는 이 독백에서 셰익스피어는 우리 인간의 삶을 어머니 품에서 젖을 먹는 유아, 학교 가기 싫어하는 학생, 용광로처럼 한숨 짖는 사랑에 빠진 연인, 명예 앞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군인, 오른 말만 하는 판사, 목소리가 작아지고 정강이가 말라가는 노인, 그리고 이도 빠지고, 눈도 잘 보이지 않게 되고, 입맛도 없고, 모든 것이 없어지는 인생의 마지막 단계인 제2의 유아기와 망각의 시간 - 이렇게 일곱 단계로 요약하였다. 나는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따져 보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이제 별 수 없는 노인이다. 나는 별 것 아니지만 지금까지 이룬 것에 그리고 현재의 나에 만족해야만 할 시기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가 아니다. 나는 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인생의 요구조건을 수락하여야만 한다. 많은 것을 버리고 아주 적은 몇 개에 매달릴 때다. 발걸음조차도 조심스럽게 옮길 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질풍을 뚫고 날아가야만 하는 새가 앉아서 미리 날개를 고르듯이 나도 이제 나의 앞에 닥쳐올 가장 크고 두려운 어두움을 뚫고 나갈 준비를 할 때다 - 내가 더 늙어 이제는 그 좋아하던 책을 읽을 수 없을 때를 대비하여 마음을 그 어느 때보다 더 단단히 먹을 때다.
    (2008년 1월)  
추천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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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i Roby님의 댓글

Jini Roby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Dear Professor Lee:

I read with tender appreciation your reflections in the Korea Times today.
I am a native Korean although I do not know how to type it on the computer.
I am a law professor in my middle 50’s, and the mother of three grown children.
I have often wondered what it will be like to reach the end of my road, professionally. Your essay is both poignant and hopeful..

Thank you for sharing such an honest look at yourself.
If you care to respond, I can read Korean very well, as I lived in Korea until age 14.

In any case, thank you.

Sincerely,
Jini Roby

Brigham Young University

Provo, Utah USA 2008-01-07 16:3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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