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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TERARY WORKS


감기와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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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로 들어서면서 나는 지독한 감기에 걸려 보름 이상 죽을 고생을 하였다.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어도 몸은 춥고 떨렸으며, 머리는 띵하고 사지는 쑤시고 아팠다. 식욕은 싹 살아져버려 먹는 것, 마시는 것은 하나 같이 소태맛이었다. 누런 콧물은 쉴 사이 없이 흘러나왔으며, 기침과 재채기를 할 때마다 목구멍에서는 푸르스름한 가래가 끝도 없이 덩어리로 터져 나왔다. 사람의 몸 속에 이렇게 더럽고 구질구질한 것이 이처럼 많이 들어있다는 사실이 새삼 의아스러웠다. 하도 괴롭고 신세가 처량하여 차라리 죽고 싶기도 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이루 다 셀 수 없이 여러 번 감기에 걸려 앓아보았지만 이 감기라는 병이 이처럼 무섭고 괴로운 고문인 줄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아마도 나의 나이 탓인가 보다.

         어쨌든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났다. 지금 나는 이번 독감의 회복기 마지막 단계에 있다. 나는 다시 삶의 즐거움과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나는 그간 감기로 상실했던 식욕을 위시하여 모든 다른 육체적 정신적 기능을 거의 회복하였다. 오늘은 무엇인가 쓰고 싶은 욕망 내지 의욕조차 느낀다. 그렇지만 당장 이 일에 달려들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다. 왜냐하면 이 즐거우면서도 꽤나 힘든 이 일을 잘 해낼 만큼 과연 나의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었는지 아직 나의 건강상태에 대하여 백퍼센트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건강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하나 있다. 오늘 아침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부엌에 들어가 의심 반 믿음 반의 심정을 가지고 내가 마실 커피를 끓였다. 감기에 걸려 고생한지 거의 삼주일 만에 처음이다. 커피 맛만 돌아왔다면 만사 오케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완전한 컨디션이 아니다. 좀 더 기다려야만 한다. 애석하게도 커피는 나를 실망시켰다. 아니다, 커피가 나를 실망 시킨 것이 아니고 내가 커피를 실망 시켰다.

         그런데 보다시피 이처럼 나는 이미 글쓰기를 시작하고 말았다. 가끔 운동선수들이 신체적으로 완전한 상태가 아니더라도 경기에 임하여야 하듯이, 신문에 칼럼을 가지고 있는 나도 비록 건강상태가 썩 좋지는 않다 하더라도 또 하나 써야만 하겠다는 어떤 의무감에서 또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마지막으로 글을 기고한지도 벌써 한 달이 넘었다. 매주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써야 어렵게 얻은 칼럼을 좀 더 오래 유지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따끈한 커피 한 잔의 축복이 없이 시작된 이 글의 진행이나 결과가 신통할 리가 없으리라는 사실은 아주 불을 보듯 뻔하다. 잘 못되더라도 독자들의 너그러운 이해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 글은 지금까지 내가 써낸 수많은 글 가운데서 옆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 잔이 없는 상태에서 쓴 최초의 글이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마실 것들 가운데서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커피는 나의 삶에 있어서 아주 각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담배를 피우지도 않고 술도 많이 마시지 못한다. 대신 커피는 아주 즐긴다. 어떤 사람은 커피가 위장에(소화에) 좋지 않아서 커피를 멀리한다고 한다. 그런데 나에게 있어서 커피는 단순히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음료 이상이다. 하나의 습관이요, 각성제인 동시에 진정제요, 행운을 가져다주는 부적(符籍) 같은 것이다. 커피 한 잔은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제일 먼저 거행하는 성스런 의식이요, 점심을 먹은 다음에는 빼놓을 수 없는 절차요, 대화의 창구요, 우정의 촉매제요, 건강의 바로미터이다. 커피를 마셔야 할 때 마시지 못하면 나는 허전하고, 불안하고, 불편하다. 커피 잔이 비어 있으면 나는 글을 쓰지 못한다.

         커피가 나에게 해주는 심리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역할과 기능을 많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술과 담배가 해주는 것 같다. 그런데 나처럼 몸과 마음을 허약하게 타고난 사람에게 있어서 커피에 대해서만은 아직 부정적인 의학적 견해가 술이나 담배에 비하여 거의 없다는 사실에 나는 크게 안도하고 있다. 담배와 술이 우리 인간의 신체에 끼치는 의학적인 해악을 떠나서 나의 경험과 관찰을 통하여 볼 때, 전자는 가뜩이나 나쁜 실내의 공기를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은 확실하며, 후자는 사람의 온전한 정신을 잠시나마 마비시켜 버리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술 취한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다. 우선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데나 누워 잠을 자고, 아무데서나 소변을 본다. 전철에서는 다른 조용한 승객들로부터의 걱정스럽고 짜증스런 눈총도 아랑곳없이 너무 큰 소리로 불특정 다수인을 상대로 너무나 많은 언론의 자유를 누린다. 이런 면에서 보면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은 참으로 신사들이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어떤 불미한 행동을 저질렀다거나 실수를 하였다는 소문을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은 적도 없고, 또 그런 사람을 본적도 없다.

         맞다. 커피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성품이 부드럽고 매너가 세련된 사람들이다. 서울이나 기타 큰 도시에 있는 유명한 커피숍에 가보라. 우선 커피숍은 깨끗하고, 조명이 환하게 잘 되어있으며, 은은한 커피의 향기로 - 인간이라면 결코 싫어할 수 없는 천상의 향기로 - 충만해 있을 것이다. 여기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보라. 이들은 하나같이 단정하고 우아한 복장이며, 이야기를 하더라도 소곤소곤 부드럽게 하며, 어떤 고상한 생각에 잠겨있거나, 음악을 듣고 있거나, 책을 읽거나(아니면 신문이라도), 조용히 앉아 친구나 애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커피 한잔을 앞에 놓고 가능하다. 서울처럼 거대하고 살벌한 대도시에서 다른 물건을 파는 곳에서 이런 풍경이 가능할까? 어림없는 일이다. 분명 커피 속에는 살벌하고, 무미건조하고, 외로운 도시생활을 부드럽고 낭만적인 문명생활로 바꾸어놓는 신비하면서도 강력한 힘이 들어있다.

         나는 과연 이 세상에서 커피라는 것이 발견되어 지금처럼 널리 애용되지 않았어도 우리 인류의 문명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의 모습으로 발전하였을까 혼자 생각해본다. 우선 다른 분야는 그만두고라도 예술분야를 보자. 과연 커피의 신비스런 힘의 도움이 없이 그 훌륭한 작품들이 만들어졌겠느냐 하는 점이다. 예술가들 중에는 새로운 영감을 얻고 또 그것을 작품화하는데 커피보다는 술의 힘을 빌리고 의지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술은 예술가들로 하여금 너무나 비싼 대가를 요구한다. 술 때문에 건강을 잃거나, 정신을 잃고 미쳐버리거나, 가정을 망치고 아내나 자식들을 굶게 만들거나, 결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시인들이, 화가들이 자고로 어디 한 두 사람인가?  비록 술보다는 훨씬 그 약효는 약하지만 커피는 이런 예술가들의 광기를 건강하고 건전한 창조력으로 변화시켜 이들로 하여금  보다 많은 작품을 생산하도록 도와주는 아주 좋은 힘을 가지고 있다. 커피를 애호하는 시인이 술을 선호하는 시인보다 더 오래 산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영문학을 전공한 나는 19세기 말부터 영국의 수도 런던에 찻집(티숍)이 갑자기 여기저기 생겨나기 시작하였으며, 이곳에서 바로 영국 신사(젠틀맨)들이 탄생하였다는 사실을 영문학사에서 읽은 적이 있다.  이런 사실을 상기하면서 나는 최근 서울에 아주 화려한 시설을 갖춘 현대적 감각의 대규모 커피점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을 즐거운 호기심을 가지고 주목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생겨나고 있는 커피숍에서는 단순히 커피만 파는 것이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맛있는 과자와 케이크도 팔고 있어 간단한 요기도 할 수 있으며, 더욱 더 놀랍고 고마운 일은 내가 아무리 오래 앉아있어도(커피를 주문하지도 않고) 누가 뭐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곳에 가면 맛 좋은 커피를 마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친구와 장시간 자유롭게 이야기도 나눌 수 있으며, 깨끗한 화장실도 사용할 수 있다. 여기서 학생들은 숙제도 할 수 있고,  나이든 사람들은 신문도 읽을 수 있으며, 시인은 시상을 가다듬을 수도 있고, 비즈니스맨은 상담을 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커피라는 간단하면서도 신비스런 매개체를 통하여 가능하다. 나는 커피에서 인류의 밝은 장래를 본다. 커피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이제 시작한 글도 끝낼 때가 되었나보다. 내가 지금까지 커피와 관련하여 지나친 칭찬을 하였다던가, 좀 과장된 말을 했다면, 그것은 분명 내가 이글의 시작에서 이미 말했듯이 커피의 은총이 없이 이 글을 쓰기 시작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별안간 새삼스레 커피 한잔을 마시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욕망이, 그리고 유혹이 불현듯 일어남을 느낀다. 몸의 컨디션이 좋아졌다는 신호다. 이제는 감기에서 완전히 회복하였다는 확실한 증거다. 나는 부리나케 부엌으로 달려가 새로 커피를 끓였다. “아, 이 맛! 바로 이것이다!”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으니 지금까지 온전하지 못한 정신상태에서 지껄인 커피에 관한 모든 헛소리들은 다음의 간단한, 그러나 바위처럼 견고하고 시공을 초월한 진리 하나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취소하겠다. “이른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마시는 한 잔의 커피는 언제나 나의 몸속에 아직도 남아있는 잠을 쫒아내고, 나로 하여금 하루의 일을 시작하는데 필요한 맑은 정신을 가져다 준다.”
                                                                                                                             (2007년 1월)

추천149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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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홍님의 댓글

노홍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아버지의 강요(?)에 의하지 않고 자진하여 읽은 몇개 되지 않는 수필중 하나가 될 것 같네요^^.
 
수필에 대한 평가는 집에서 하기로 하고, 글을 읽다보니 절로 진한 카푸치노 한잔이 생각납니다.
은은한 커피향, 잔잔한 클래식음악, 그리고 멋진 시와 수필들...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일상을 평생 너무나 열심히 즐겨오신 아빠... 정말 존경하고 사랑해요.

그리고 요즘 만만치 않은 아버지의 커피값은 저희가 쭉 책임질테니 걱정마시고 즐기시길 (별로 걱정하시는 것 같지도 않지만^^)
아버지의 커피사랑이 영원하길 기도하며...

둘째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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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국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고맙다,

이노홍. 효녀 심청이 따로 없느니.
-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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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재욱님의 댓글

추재욱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교수님 연구실에서 맛보던 구수한 커피가 그립습니다.
이제 조만간 교수님 서재에서 다시 한 번 그 맛을 느낄 수 있기를 고대하겠습니다. . . .

펜실베니아에서 제자 올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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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국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추 교수,

다시 한번 추교수의 모교 교수 취임을 축하하네.
그동안 자기 발전과 개발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한 데 대한 당연한 결과라고 나는 생각하네.
이럴 때 쓰는 영어가 바로 "You deserve it" 이지. 영어공부라는 긴 여정의 새로운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축하! 또 축하! 서울에 도착하는 즉시 터방네에서 만나 커피 한잔 하자구.
커피 값은 자네가 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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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아영님의 댓글

박아영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이번에 추 교수님의 통번역 수업을 듣는 학생입니다.^^

추 교수님이 이 교수님의 본 수필을 발췌하여 수업시간에 내 주셨는데,
제목은 감기과 커피임에도 커피에 대한 내용은 그다지 비중을 많이 차지하지 않아 의아했더랍니다.

그런데 첫수업을 마치고 달려와 본문을 보니, 이렇게 정감 있는 우리말로 사뭇 커피 찬양론처럼도 보이는 이 글이
커피를 교수님만큼은 사랑하지 않는 저로 하여금 한 잔을 마시고프게 하네요.^^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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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국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나의 수필은 발췌하여 읽으면 그 맛이 가지.
한 줄이라도 빼놓지 말고 다 읽어야만 그 맛이 살아나지.
처음부터 이글은 커피 찬양론으로 쓴 글이란다.

읽어주어 고맙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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