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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부터 약 일 년 전, 정확하게는 2005년 4월 12일, 나는 “어느 무명 화가를 생각하며”라는 제목의 글을 써(영문으로) 영자신문〈코리아 타임스〉에 있는 나의 칼럼에 발표하였다. 글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여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다: 내가 미국 펜실바니아 주에 있는 빌라노바 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었던 1973년 어느 날, 나는 당시 고등학교 학생이었던 하숙집 주인 아들 죤을 따라 소위 ‘거라지 세일’을 하는 데를 가 보았다. 여기서 나는 2달러를 주고 풍경화 두 개를 샀다. 그런데 이 그림 두 개는 나와 함께 귀국하여 지금까지 30년이 넘게 나의 아파트 벽에 걸려 있다. 그림 하단 왼쪽에 똑같이 G. Cherepor(지. 체리포)라는 화가의 영문 사인이 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다가 최근에 와서 혹시나 해서 컴퓨터로 검색을 해 보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무명화가임이 분명했다. 비록 무명화가의 그림이지만 (그것도 원본은 아니고 대중들을 위한 값싼 복사판) 이 그림은 내가 지금까지 돈 주고 산 유일한 그림이며, 그동안 나에게 이 세상의 어떤 다른 유명한 화가의 그림보다 더 많은 즐거움을 준 그림이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이제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만) 자기의 작품 가운데 두 개가 우연히도 가난한 한국 유학생의 손에 들어와, 태평양을 건너 이 먼 한국까지 흘러와, 이처럼 오랜 세월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영혼이라도 있어), 얼마나 기뻐할 것인가? 이런 내용의 글이었다.


     그런데 바로 일주일 전, 정확하게는 2006년 11월 24일, 나는 미국에 살고 있다는 웬 낯선 사람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이메일을 받았다: “저도 지. 체리포가 그린 그림을 한 폭 가지고 있습니다. 그림 속에는 붉은 색의 헛간이 한 채 있으며, 멜빵이 달린 작업복을 입은 농부가 말을 끌고 이 헛간 쪽으로 가고 있답니다. 그림 왼편에는 빈 마차가 한 대 놓여있으며, 헛간 주위로는 흰색의 울타리가 둘러쳐 있습니다. 나의 아버지가 몇 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이 그림은 아버지 집에 걸려있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에 대하여 좀 더 알고 싶어 해 왔는데 알 길이 없군요. 혹시 당신은 좀 더 이 화가에 대하여 알아낸 것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있으면 좀 알려주세요. 감사합니다. 저는 미국 플로리다 주 올란도에 살고 있는 마사 로우입니다.”

     나는 즉시 이 사람에게(여자인 것이 분명함)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이메일 답장을 보냈다: “나는 이 세상에 지. 체리포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기쁘고 놀랐습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다는 그림의 내용으로 판단해 볼 때,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두 개의 그림 가운데 하나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나는 흥분과 스릴조차 느낍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화가에 대하여서는 더 알아낸 것이 아직 없답니다. 그런데, 정작 내가 궁금한 것은 어떻게 당신이 생면부지의 나에게 이런 이메일을 보내게 되었느냐하는 점입니다. 우선 어떻게 나의 이메일 주소를 알게 되었나요? 나의 추측으로는 혹시라도 당신이 내가 〈코리아 타임스〉에 쓴 글을 읽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이런 추측도 당신과 나 사이의 지리적 거리를 감안하여 본다면 그 가능성이 지극히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궁금합니다.”

     마사 로우 여사로부터 답장이 즉시 전파를 타고 나의 컴퓨터에 도착했다. 사정은 이러했다. 어느 집에서고 어떤 그림이 오랫동안 벽에 걸려있게 되면 자연이 주인은 그 그림을 그린 화가에 대하여 알고 싶어지며, 동시에 그 그림의 가격(시가)에 대하여서도 궁금해지게 마련이다. 혹시나 이 그림이 어떤 유명한 화가의 그림이 아닐까? 그 가격 또한 엄청나지나 안을까? 하는 호기심 말이다. 이런 호기심에서 이 여자는 자기 아버지가 물려준 이 그림의 화가 이름 G. Cherepor를 구글 웹사이트에 올려 검색을 시도하였다. 그런데 거기에 떠오른 것이 놀랍게도 바로 내가 이 화가의 그림에 대하여 〈코리아 타임스〉에 쓴 글의 일부였다. 이 여자는 거기에 나타난 〈코리아 타임스〉웹사이트에 클릭하여 나의 글 전부를 읽을 수 있었으며, 나의 글 끝에 쓰여 있는 나의 이메일 주소도 알아낸 것이다.

     나는 마사 로우 여사와 나 사이에 오고간 이와 같은 내용을 나의 홈페이지(www.leewell.com)에 실었다. 싣자마자 나의 홈페이지를 자주 드나드는 나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 글을 읽고는 아주 간단하면서도 참으로 놀라운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이 친구는 본래 만물박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며, 여기에다가 컴퓨터에는 도사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컴퓨터 조작이나 검색에 통달한 사람이다. 우선 이 친구는 우리가 알고 있는 화가의 이름 끝 글자가 r이 아니고 v라고 간단히 정정해 주었다. 다시 말해서 이 화가의 이름은 지. 체리포(G. Cherepor)가 아니고 지. 체리포프(G. Cherepov)이며, 이 화가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싶으면 이 방면의 전문 사이트인 www.askart.com에 들어가 보면 거기에 이 화가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맞어! 어째서 나는 이 화가의 이름 끝 글자를 v로도 읽을 수 있었는데 어째서 r로만 읽으려 들었단 말인가? 다시 화가의 사인을 확인해 보니 r보다는 v에 더 가까웠다. v로 읽었더라면 이미 일 년  전에 쓴 글의 제목을 비롯하여 모든 것이 달라졌을 것이었다.  
  
     나는 제자가 알려준 www.askart.com을 열고 G. Cherepov란 이름을 검색창에 오려놓고는 클릭하였다. 과연 화가 조지 체리포프(George Cherepov, 1909-1987)의 화려한 그림의 세계가 짙은 아침 안개가 걷히면서 서서히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는 높은 산의 봉우리처럼 나의 시야에 서서히 들어왔다. 우선 나는 부끄러웠다. 내가 이 화가에 대하여 가졌던 선입견들은 다행스럽게도(?) 모두가 근거 없는 망상으로 들어났기 때문이었다. 우선 이 화가는 결코 무명화가가 아니었다. 대단한 명성을 누린 화가였다. 그는 20세기 미국의 풍경화가들 가운데서 가장 널리 알려진 성공적인 화가들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난 이 사람은 일찌감치 이미 유럽에서 그의 재능을 인정받은 화가로서 유고슬라비아 알렉산더 왕의 공식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청탁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를 피하여 미국으로 건너와 커네티커트 주 그린위치에 정착하였다. 그는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미국의 동부 뉴잉글랜드 지방의 풍경에 매료되었으며, 특히 화려하기 그지없는 가을단풍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버렸다. 그는 우리의 눈만이 아니고 영혼까지 동시에 매혹시키는 풍경화를 수도 없이 그려냈다. 그의 그림은 삽시간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으며, 그의 명성은 고향 커네티커트 주뿐만 아니라 인근 버몬트, 필라델피아, 그리고 뉴욕까지 퍼져나갔다. 그의 그림을 전시하는 전시회는 셀 수 없는 정도로 쉴 사이 없이 열렸다. 생전 그는 미국에서 화가에게 주어지는 여러 개의 명예로운 상도 받았으며, 각종 화가협회에 정회원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그가 남긴 그림들은 현재 미국 전역에 걸쳐 널리 여러 가정집에 분산되어있는 이외에, 독일의 몇몇 미술관과 미국 아리조나 주 터스콘에 있는 주립 미술관에 수집 소장되어있다.

     화가 조지 체리포프가 세상을 떠난지도 이제 20여년이 지났다. 나는 이 화가가 한 예술가로서 뿐만이 아니고 한 개인으로서도 더 바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명예와 동시에 부를 누리고 행복하게 살다 간 사람이라는 사실에 크게 안도하고 기뻐하는 바이다. 얼마나 많은 재능 있는 예술가들이 불운과 불행 속에서 생애를 마감하는가 말이다. 처음 이 화가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면서(이름조차 잘못 알고) 이 화가의 그림 이야기를 한 나의 무식에서 온 부끄러움도 내가 이 화가의 그림에 지금까지 한 결 같이 품어온 사랑과 존경 앞에서는 현저하게 수그러들었다. 분명 우수한 예술작품은 작가의 이름 없이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 역이 항상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 이제 작가가 밝혀진 그림 앞에 서있다. 이 같은 크기의 그림 두 개는 지난 30여 년 동안 나의 아파트 서재 벽에 나뉘어 걸려있어 거의 매일 보는 그림이다. 그런데 오늘 따라 같은 그림이 아주 달라 보인다. 더 아름답고, 기술적으로 더 성숙된 정말 대가의 그림다워 보인다. 무엇보다 막연히 아주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으로 여겨지던 화가의 모습이 아주 친한 친구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림 앞에서 잠시 회상에 빠졌다. 알고 보니(따져보니) 내가 이 그림을 샀을 당시 나는 체리포프라는 화가를 미국에서 만났을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거라지 세일’에서 그의 그림을 샀을 때 그의 나이는 지금 나보다 한 살 아래인 65세였으며, 그는 내가 살았던 펜실바니아 주에 인접하여 있는 커네티커트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내가 이 체리포프라는 화가의 이름과 명성을 알았더라면 나는 그의 그림을 전시한 전람회나 그의 그림을 소장한 미술관에도 한번쯤 찾아갔을 것이다. 아니, 우리는 우연히 뉴욕이나 필라델피아의 어느 복잡한 도심지 거리에서 옷소매를 스치면서 무심히 서로 지나쳤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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