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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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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우리나라 각 급 학교에서 영어 과목을 가르치고 있는 영어교사들은 - 이들 가운데서도 특히 장기 해외유학이나 해외연수와 같은 경험이나 경력 같은 것은 전혀 없이 순전히 한국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니면서 영어를 배우고 공부를 하여 교사가 된 후 각 급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토종 영어교사들은 - 곤경에 처하여 있다. 이들은 지금부터 삼사십년 전 내가 교사로 근무하였을 당시의 영어교사들과는 전혀 다른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다. 그때도 지금처럼 교사 개인에 따라 영어에 관한 지식이나 교수방법에 있어서는 우수한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었지만, 어쨌든 교실에서 영어에 관한한 영어교사는 단연 권위자였다.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부강한 선진국의 언어인 영어를 가르치게 된 영어교사는 단연 교사들 가운데서도 각광을 받는 존재였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 영어의 필요성이나 중요성에는 변함이 없고, 오히려 그것이 더 강조되고 있는 실정인 반면, 영어교사들이 그동안 교실에서 누려온 권위와 특권은 흔들리고 있으며, 안팎으로 밀려오는 외세에 의하여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게 된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우선 해외, 특히 미국을 위시하여 영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나라에 가서 체류하는 사람들과 그 기회가 늘어나면서 교실에는 부모를 따라 해외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귀국한 학생들이 으레 상당수 있게 마련이며, 이런 학생들의 영어실력은 (특히 발음이나 읽기, 말하기에 있어서) 그런 기회에 노출된 경험이 없는 순수한 국산 영어교사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겁먹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런 학생들의 수는 앞으로 늘면 늘었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학생이었을 때나 나 자신이 영어교사였을 당시에는 생각지도 못한 사태이다.

     집에 있는 학부모들의 우수한 영어실력 또한 교실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영어교사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되고 있다. 내가 교사일 당시만 하더라도 영어교사의 영어실력에 도전할만한 학부모는 전무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혹시 있었다 치더라도 감히 무례하게 자기의 영어실력을 교사 앞에서 나타낼 수도 없었고, 또 그럴 풍토도 아니었다. 우선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대학 졸업자가 아니었으며, 그들의 영어실력 또한 대학을 졸업하였고 교사자격증으로 무장한 영어교사의 적수가 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였다. 요즈음 부모들은 대부분이 대학졸업자들이며, 이들 가운데는 교사의 영어실력을 능가하는 아주 뛰어난 사람들도 많이 있다. 이들은 집에 앉아서 아이들이 집에 가져온 시험문제의 타당성이나 정답의 오류를 집어낼 수준이며, 교사의 잘못된 발음을 지적할 수도 있으며, 문법적인 지식에 대하여 교사에게 이의를 제기할 정도다. 이들 가운데는 교사에게 전화를 걸어 자식의 학기말 영어시험 점수에 관하여 항의조로 전화를 걸기도 한다. 이제 교사들은 교실에 있는 학생들만이 아니고, 교실 밖에 있는 학부모들에게도 신경을 써야만 한다.

     영어교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주눅 들게 만드는 요소들은 또 있다. 교실에서 교사들의 역할이 점점 줄어들거나 약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어 교과서 읽기만 해도 그렇다. 예전 같으면 교사의 읽기는 발음이나 인토네이션 등 모든 면에 있어서 학생들이 따라하고 모방해야만 될 유일한 모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완벽한 영어 원어민의 목소리로 녹음된 성능이 우수한 카세트테이프나 비디오테이프가 얼마든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이 마당에 있어서 구태여 아무래도 여기에 못 미치는 영어교사의 읽기를 고집할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교사는 이제 이런 기계에 버튼만 누르면 된다. 여기에 컴퓨터까지 교실에 침입하여 영어교육에 한몫을 하겠다고 나서는 판국이다. 이래저래 전통적인 교사의 역할은 이런 기계를 조작하는 일로 축소 내지 대체되는 추세다. 교실에서의 영어교사의 목소리는 날이 갈수록 작아지고 있다.

     영어교사들의 수모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학생들이 아예 교실을 떠나고 있다. 학생들이 그리고 학부모들이 이 나라의 영어교육의 실용성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자식들을 외국으로 빼돌리고 있다. 영어를 빠른 시일 안에 좀 더 효과적으로 공부하겠다는 의도에서 이제 학생들은 아예 영어가 모국어인 나라로 일찌감치 유학을 떠나고 있다. 엄청난 정신적 경제적 부담을 무릅쓰고 어린 자녀들을 멀고 먼 이국으로 보내기로 결정한 야심에 찬 부모들의 대담하고도 가슴 아픈 결정의 밑바닥에는 국내 영어교사들의 능력과 교육방법에 대한 회의와 불신이 깔려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나라에 가서 살면서 영어를 배우고 익히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있을 수 없으며, 이렇게 현지에서 습득한 유창한 영어실력은 앞으로 자식들이 좋은 직업을 얻는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유리할 것이라는 기대와 계산도 깔려있다. 이런 현실 앞에서 국산 영어교사들은 속수무책이요, 유구무언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더 큰 위기가 닥쳐오고 있다.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원어민들이 몰려오고 있다. 이들은 마치 구약성서에 나오는 메뚜기 떼와 같이 몰려와서는 지금까지 토종 영어교사들이 독차지해온 텃밭에 내려앉아 터줏대감들을 몰아내고 있는 판국이 되어버렸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어 내버리는 형국이다. 영어가 모국어인 이들은 지금 유치원에서부터 시작하여 대학에 걸쳐 없는 곳이 없다. 이런 기세로 나간다면 머지않은 장래에 모든 국산 영어교사의 자리는 이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원어민 교사들에 의하여 채워질 것이 불을 보듯 번한 일이며, 국산 영어교사들은 모두가 교실 밖으로 밀려나 실업자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이다. 이미 이런 일은 시작되었다. 국내의 많은 대학들이 소위 “교양영어”라는 전통 깊은 과목을 원어민들에게 맡김으로써 지금까지 여기에 매달려온 수많은 가난하고 불쌍한 대학 강사들이 하루아침에 밥줄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 이 정도는 그래도 참고 견딜만하다. 정작 토종 영어교사들의 자존심과 정체성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는 위기가 기다리고 있다. 이제부터 영어교사는 교실에서 모름지기 영어만 써야한다는 무시할 수 없는 압력을 받게 되었다. 모두가 영국 사람이나 미국 사람처럼 영어를 자유자제로 구사할 수 있다는, 아니면 구사해야만 한다는 전제하에서 이제부터 우리나라의 영어교사들은 교실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영어로 해야지 우리말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이런 엄청난 요구 앞에서 대부분의 이 나라 토종 영어교사들은 이 사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놓고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들은 자기들의 영어가 이렇게 하기에 부족함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좋은 우리말을 두고 영어로 설명하고 가르친다는 것이 과연 더 효과적인가에 대한 의구심도 적지 않다. 그러나 나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소 하고 사표를 내던질 수 도 없는 형편이다. 어쨌든 교사로서 살아남으려면 이런 시대가 가져온 유행에 따르는 수밖에 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이래저래 토종 영어교사들은 우울하다. 슬프다.

     그러나 우울해하고 슬퍼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살 길을 찾아야만 한다. ‘궁즉통’(窮卽通)이란 말도 있지 않는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우리 토종 영어교사들이 현재 처하여 있는 위기에서 탈출하여 살아남는 길은 다음 두 가지 가운데 하나다: 첫째, 아예 영어를 원어민, 즉 미국 사람이나 영국 사람처럼 유창하게 잘하도록 실력을 기르는 일이다. 그런데 이것은 말이 쉽지 어디 그렇게 하루나 이틀사이에 쉽게 될 수 있는 일인가? 밥에 김치와 깍두기를 먹고 자란 토종 영어교사들로서는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배짱 뿐이다. 배짱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누구 앞에서든지 자기는 영어를 조금도 어려움 없이 잘 할 수 있는 사람처럼 뻔뻔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가능하면 발음도 버터와 빵을 먹고 자란 사람들처럼 굴리는 것도 중요하다. 제스처도 그 사람들처럼 하면 더 효과적이다. 물론 이 방법도 좋은 우리말 두고 하자니 어렵고 치사한 일이지만, 어쩌랴, 세상이 변한 것을! 토종 영어교사들이여, 명심하라, 이제 옛날의 교사는 없다. 오직 교단에는 배우가 있을 뿐이다. 영어실력보다는 연기력을 기를 때다.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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