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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과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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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여러모로 대단히 운이 좋은 사람이다. 특히 영어라는 언어와의 인연에서 두드러지게 그렇다. 중고등학교를 통하여 영어라는 과목을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좋아했고, 또 누가 특별히 가르쳐주지 안했어도 다른 과목보다 잘했으며, 대학에 들어가 영어를 전공하게 되었으며, 졸업을 한 뒤에는 처음에는 영어교사로, 나중에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어 지난 해 봄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약 삼십여 년 간 영어를 가지고 무사히 그리고 편안하게 살아왔으니 말이다. 그 오랜 기간 영어라는 과목은 꾸준히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어 매학기 나의 과목을 수강하는 학생들의 머릿수에 특별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는 사실 또한 돌이켜보니 대단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간 영어가 가져다 준 그 변함없는 인기와 그것이 나에게 베풀어준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영어가 아니고 다른 외국어를 선택하였더라면 사정은 사뭇 달라진다. 우리나라에서 영어 이외에 다른 외국어의 경우 그 운명은 그리 순탄치가 않다. 예를 들어 프랑스어나 독일어의 경우를 보자. 내가 고등학교 학생일 때만 하여도 독일어나 프랑스어의 인기는 (비록 제 2 외국어이긴 하였지만) 결코 영어에 뒤지 않았으며, 소수의 아주 우수한 학생들은 오히려 영어를 제쳐놓고 독일어나 프랑스어를 선호하였으며, 대학에 가서는 이것을 전공하였다. 나도 고등학교를 다닐 때 독일어 시간에 배운 괴테나 하이네, 그리고 릴케의 시 몇 수를 읽고는 그것의 매력에 끌려 대학에 가서 영문학이 아니고 독문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도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영어로 방향을 잡았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 일 날 뻔하였다. 왜냐하면 그 후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독일어와 프랑스어가 갑자기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잃었으며, 그렇게 되니 그것을 가르치는 교사들의 처지 또한 동시에 어렵게 되었다. 프랑스어나 독일어가 급격히 쇠퇴한 대신, 한 때 무시당하고 미움까지 받았던 일본어와 중국어가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어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꾸준히, 아니 오히려 그 위력이 더 해가고 있는 것은 오직 영어뿐이다. 구태여 역사상 어떤 위대한 철학자나 현자들의 말을 빌릴 필요도 없이 세상만사는 변하는 것이며, 영구한 것은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영어라는 외국어의 인기만을 놓고 볼 때 예외를 인정해야만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영어 앞에서는 이 만고불변의 법칙조차 무색할 지경이다. 다시 말해서 영어는 이런 법칙의 위에 또는 그 넘어 존재한다고 말해야만 할 정도다. 영어의 인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요지부동이다. 요지부동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승일로다. 그리고 현재 어디를 둘러보아도 영어의 위력이 조만간 약화된다거나 그 영향력이 쇠퇴할 기미는 발견할 수 없다. 도대체 이런 영어의 그 끈질긴 생명력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나는 그저 의아할 뿐이다.

     일생 영어를 공부하면서, 또 영어를 가르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나에게도 이 세상에 그 수많은 언어들 가운데서 유독 이 영어라는 이름의 언어가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전 세계에 걸쳐 지금처럼 대단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모를 일이다. 물론 영어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문화, 군사적으로, 미국과 영국이라는 지구상에서 가장 막강한 나라의 언어이며, 우리는 해방과 한국전쟁이후 지금까지 여러 면에서 이 나라와는 뗄 수없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하겠으나, 꼭 그 이유에서만은 아니 것 같다. 싫던 좋던 간에 영어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필요한 언어가 되어버렸다. 영어는 비즈니스와 외교의 언어다. 비행기 조종사들과 선박을 운전하는 선장들도 영어로 교신한다. 스포츠와 과학에서도 영어가 주 언어다. 컴퓨터 소프트웨어도 영어로 되어있다. 국력이나 과거의 역사, 전통과 영광으로 보아 영국이나 미국에 비교하여 손색이 없는 프랑스어도 아니고, 중국어도 아니고, 러시아어도 아니고 그렇다고 스페인어도 아니다. 어째서일까?

     나 개인적인 생각인데 영어에는 분명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좋아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숨어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언어를 제쳐놓고 우리들로 하여금 영어를 더 좋아하게 만들고 더 많이 사용하게 만드는 어떤 요소가 들어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내가 이 지구상의 언어들 가운데 외국어로는 영어밖에는 모르는 사람이니 별 수 없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보더라도 나의 생각에는 별 변화가 없다. 나 개인의 생각으로는 영어가 이처럼 이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언어로 자리 잡게 된 데는 영어의 이율배반적인 이중적 성질에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쉽고도 어려운 점 말이다. 영어는 쉽고도 어려운 언어다. 영어는 엉터리로 말하기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언어다. 반면에 제대로 하기에는 참으로 어려운 언어다. 영어는 질그릇처럼 투박하고 한없이 융통성이 있는 언어인 동시에, 갓 시집온 새색시나 이제 막 날기 시작한 잠자리 날개와 같이 섬세하고 까다로운 언어다. 영어는 오랜 역사와 문화 속에서 탄생한 관용구와 시시각각으로 만들어져 유행되는 은어들의 집합체다. 특히 영어는 다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받아 수용함에 있어서 대단히 개방적이며 신속하다. ‘김치’라는 우리말이 영어사전에 포함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프랑스어 사전이나 독일어 사전에 이 단어가 포함되었다는 소식은 아직도 없다. 영어는 우아할 때는 더할 수 없이 우아하고, 상스러울 때는 사창가의 포주도 얼굴을 붉힐 정도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어 속으로 쉽게 뛰어들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엉터리 영어를 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는 누구를 막론하고 엉터리 영어, 비문법적인 영어, 즉 ‘부로큰 잉글리쉬’와 우리 말 식의 영어, 즉 ‘콩글리쉬’를 아주 잘하고 있으며, 애용하고 있으며, 여기에 아주 익숙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는 누구나 필요한 경우 영어 속으로 쉽게 그리고 큰 망설임 없이 언제고 뛰어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과연 우리가 다른 언어, 예를 들어 독일어나 프랑스어를 가지고 이런 만용을 쉽게 부릴 수 있는가 말이다. 어림도 없는 일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나도 다른 정년 퇴직자들이 그렇듯이 그동안 한결 같이 나를 붙잡아매어 온 나의 직업과 자리, 그리고 익숙해진 일상적인 일을 뒤로하고 떠나게 되어 서운한 마음 어쩔 수 없다. 동시에 이제 갑자기 많아진 나의 자유와 시간, 그리고 지금까지 열심히 암기하고 공부하여온 영어의 장래에 대하여서도 서운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 초조하기도 하다. 이제부터는 내가 그동안 그처럼 애써 공부해 습득한 영어에 대한 나의 지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며, 또 써먹을 곳도 없을 것이다. 나의 기억력도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쇠퇴할 것이 분명하며, 영어에 대한 지식도 사용하지 않으니 조금 지나고 나면 모두 사라져 없어질 것이 분명하다. 그동안 그처럼 부지런히, 열성을 가지고,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암기한 그 많은 영어단어들, 숙어들, 문법들도 결국 시간이 문제이지 다시 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눈에 눈물이 고이는 듯하다.

     이런 불안과 아쉬움 속에서 퇴직을 한지도 어느 듯 한 달이 지나갔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고도 다행스런 일은 나의 걱정에 찬 예측들이 하나도 맞아떨어지지 않고 모두 빗나가버렸다는 사실이다. 특히 영어에 관한 예측은 완전히 틀렸다. 그동안 얼마 지나지는 않았지만 영어가 나를 떠나고 있다는 증상이나 증거는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매주 나의 책상 위에는 주간시사 영어잡지인 『타임』과 『뉴스위크』, 그리고 『뉴욕 타임스 북 리뷰』, 월간잡지인 『내쇼날 지오그래픽』과 『리더즈 다이제스트』가 꼬박 꼬박 쌓여 퇴직 이전이나 다름없이 나를 바쁘게 만들고 있으며, 새로운 어휘나, 분명 예전에 기억한 단어이지만 그 의미가 가물가물해진 단어의 뜻을 확인하기 위하여 사전을 뒤지는 일 또한 예전이나 별다름 없다. 놀라운 일은 자주 그 잊어먹은 어휘의 뜻을 찾아 다시 사전을 뒤지면서도 나는 단 한순간도 쇠퇴해가는 나의 기억력을 저주한다거나 한탄하는 법이 없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나는 이 속에서 노년기에 사람들을 괴롭힌다는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저주스런 질병인 건망증이란 질병을 퇴치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치료방법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는 혼자 웃는다. 
 
     여기에 한걸음 더 나가 퇴직을 한 후 나는 한층 더 내가 다른 과목을 전공을 하지 않고 영어공부를 하였다는 사실을 더욱 더 깊이 실감하고 동시에 크게 감사하고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잘 믿으려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다. 이제 퇴직을 하였으니 영어는 이제 나에게 어떤 실질적인 또는 실용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이제 나의 영어는 순전히 나 개인의 만족과 즐거움만을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 이제 내가 요구하고 필요로 하는 것은 나의 작은 서재 책장에 꽂혀있는 몇 권의 영문학 고전 작품들뿐이다. 이들만 있으면 족하다. 이제 나에게는 대학교수라는 타이틀도 없고, 넓은 연구실도 없고, 매달 꼬박꼬박 받아온 월급도 없다. 나는 이제 나의 아파트에 한 구석에 있는 조그만 방 속에 갇혀 있는 새장 속의 새와 같은 신세가 되어버렸지만 나는 내심 더 자유롭고, 더 부자이며, 그리고 더 행복하다. 왜냐하면 이제 나는 그동안 쓸데없는 일에 시간과 정신을 빼앗겨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일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언제고 마음만 먹으면 윌리엄 셰익스피어, 존 밀턴, 윌리엄 워즈워스와 같이 인류가 탄생시킨 가장 위대한 그리고 가장 고귀한 사람들과 격 없이 만나 친구로서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제고 내가 원할 때, 그동안 갈고 닦은 나의 영어를 가지고.
     (2006년 3월)    
추천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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