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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TERARY WORKS


노벨상 조용히 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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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한달 전 일로 기억된다. TV 화면을 통하여 우리는 참으로 희한한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알고 보면 희한할 것도 없다, 왜냐하면 지난 해에도 똑같은 장면을 보았으니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여러 경로로 잘 알려진 시인 고은(高銀) 씨의 집 앞에는 작년에도 신문기자들과 TV 취재진들로 북새통을 이루었었다. 사연인 즉 이분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노벨문학상의 수상자 이름이 발표되는 작년 이맘 때에도 고은 씨의 집 앞에서 밤샘을 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들은 상을 주관하는 스웨덴 한림원으로부터 좋은 소식을 듣지 못하고 실망 속에 풀이 죽고 기가 꺾여 모두들 뿔뿔이 흩어져야만 했었다.  상은 엉뚱하게도(?) 생전 그 이름을 들어보지도 못했고 아무도 예측하지도 못한 터키 태생의 소설가 오르한 파무크라는 사람에게 돌아갔다.

     올해도 고은 씨 자신에게는 물론, 그를 추종하고 성원하는 팬들에게는 속상하고 분통 터지는 일었지만, 그놈의 노벨문학상은 혹시나 하고 목을 길게 빼고 애타게 기다린 사람에게는 오지 않고 자신의 말대로 “노벨상이란 생전 꿈도 꾸어본 적이 없었다,”는 75세의 영국 극작가 해롤드 핀터에게 주어졌다. 이 소식은 핀터 본인에게는 물론, 금년도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자들을 놓고 벌인 언론인들의 예측을 완전히 무시한 결과였다. 언론에 거론된 수상후보자들 가운데 해롤드 핀터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자다가 걸려온 전화로 자신이 금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사실을 알게 도ㅣ었으며, 뒤늦게 이 사실을 확인한 신문기자들과 TV 카메라맨들은 그의 집으로 달려가 축하와 인터뷰를 하였다.

     노벨문학상 수상을 놓고 위의 두 사람의 경우와 우리들이 벌인 해프닝과의 사이에는 무엇인가 좀 다른 데가 있음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짧고 모자라는 상식으로 판단하여 볼 때, 해마다 수여되는 노벨상은 문학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각 분야별로 수상후보자들의 이름이 언론에서 미리 거론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정작 수상자의 이름이 최종적으로 확정, 공식적으로 발표되기까지는 아무도 모르며, 또 몰라야만 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니까 그 발표의 순간까지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조용하게 기다려야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노벨상이란 거창한 상뿐만이 아니고 이 세상에 어떤 종류의 상이건 간에 그것이 제대로 운영되는 것이라면 당연히 문명사회에서 지켜지고 존중되어야만 하는 절차요, 예절인 것이다. 수상자가 미리 그 수상 사실을 알고 있는 상이라면 그것은 그리 중요한 상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 지구상에서 언제부터인지 이 노벨상 수상을 놓고 이런 기본과 상식을 지키지 않는 유일한 나라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이 지구상에서 이 노벨상이란 것을 타기 위하여 개인적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대단한 소음을 일으키고 있는 유일한 나라가 되어버렸다.

     고은 씨의 경우 특별히 나를 의아하게 만드는 것은 이런 소동의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의 처신이었다. 그는 자기 집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상스런 사태에 대하여 어떤 불쾌감이나 당혹스러움, 또는 난처함 같은 것은 눈곱만큼도 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한 듯이 행동하였다. 한걸음 더 나가 그는 노벨문학상이 자기에게 수여될 것이라는 사실을 당연한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우리 모두에게 심어주었다. 정작 수상자의 이름이 한국의 고은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도 그는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노벨상이 부적격한 사람에게나 돌아갔다는 듯이 아주 못마땅해 하는 언행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런 경우 설익은 한국 지식인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는 표현, 즉 자기는 이 상의 수상에 있어서조차 서구 강대국들의 정치적 인종적 차별의 희생자라는 말을 대놓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시사는 하였으며, 그를 옹호하고 추종하는 열성 팬들과 일부 무식한 지식인들, 그리고 언론인들조차 덩달아 이분의 이런 태도와 불만에 동조하였다. 한마다로 말해서 어째서 나에게는, 아니 우리에게는, 아직도 노벨문학상을 주지 않느냐, 줄 때도 되지 않았느냐, 하고 항의하는 식의 태도였다.

     그런데 우선 내가 궁금한 것은 어째서 신문기자들이 우리나라에 그렇게도 많은 내로라는 문인들을 모두 제쳐두고 고은 씨의 집으로만 달려갔느냐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고은 씨로 하여금 그 많은 수상후보자들 가운데서 그처럼 수상자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만들었느냐하는 점이다. 다른 문인들은 모두 죽었나? 아니면, 그들은 모두 이 상은 너무나 유명한 상이고 경쟁이 심하여 일찌감치 받기를 포기한 것인가? 이 상이 보장하고 있는 대단한 명성과 엄청난 액수의 상금에 갑자기 무관심해질 정도로 모두들 인격적으로 성숙해졌나? 아니면, 갑자기 겸손해져서 이 거창한 상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기로 결정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 문인들이 모두 일치단결하여 고은 씨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단일 후보로 내세우기로 결정하기라도 한 것인가? 아니면, 이 분은 시인으로서 시 쓰는 일 이외에 이 상을 받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은 어떤 적극적이며 구체적인 일이라도 하였단 말인가? 아니면, 혹시라도(그런 일은 없겠지만) 이 상을 수여하는데 결정적인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어떤 힌트라도 준 것인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내가 틀렸나? 노벨상 수상자를 결정하는 과정이나 관행에 대하여 내가 모르고 있는 무엇이 따로 있는 것일까? 내가 너무 순진한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나의 이 아둔한 머리로서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분명한 사실은 고은 씨의 집 앞에서 벌어진 해프닝은 그 이유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직업이 문인인 사람이 노벨상을 포함하여 어떤 종류의 문학상을 받는다는 것은 그 작가에게는 명예로운 일인 동시에 대단히 수지맞는 일이다. 특히 노벨문학상의 수상자가 된다는 사실은 재삼 말할 필요도 없이 명성과 돈을 얻기 위하여 고통스런 일을 부단히 하고 있는 전 세계의 모든 문인들의 꿈이요 희망인 것이다. 명성과 돈 - 이 두 가지는 문인을 포함하여 모든 예술가들이 생전에 이루고 달성하고자하는 실제적이요 구체적인 목표이다. 다른 고상한 꿈이나 희망은 이상일 뿐이다. 우리나라의 시인 고은 씨가 노벨문학상을 염두에 두고 이 상을 타기 위하여 남다른 집념을 보인다는 사실 자체는 나무랄 이유가 없다. 지극히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다. 
 
     고은 씨가 이 노벨문학상을 받는데 이번에 실패하였다고 해서 너무 크게 실망할 일은 아니다. 이 상이 얼마나 대단한 상인 줄은 잘 모르겠으나 조만간 우리나라 문인들 가운데 어느 분에게(고은 씨를 포함해서) 이 상이 주어질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확신이다. 안 주어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상이란 누구에게 주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노벨상 수여도 연례행사이다. 상을 주관하는 쪽에서 보면 해마다 자천 타천의 그 많은 수상후보자들 가운데서 가장 알맞은 한 사람을 골라낸다는 일이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닐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상을 달라는 사람은 많은데 자리는 하나뿐이라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세계 각국의 문학작품의 수준이나 질을 마라톤 경주의 결과처럼 일등, 이등, 삼등으로 그 순위를 정할 수 있는 개관적인 척도가 있는 것도 아닌 문학의 세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결국 수상자의 결정에는 작품에 대한 객관적인 가치 평가보다는 그때  그때의 운수가 더 큰 작용을 할 수도 있다. 누구처럼 상에 연연하는 사람을 구태여 제쳐놓고, 누구처럼 그 상을 탈 생각도 하지 않은 사람이 상을 받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노벨상이란 진정으로 훌륭하고, 현명하고, 자존심이 강한 문인이라면 애써 얻으려고 발버둥칠 대상은 아닌 것이다.

     시인에게는 노벨상 수상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 그것은 좋은 시를 쓰는 일이다. 노벨상의 수상은 마라톤 경주의 우승자에게 주어지듯이 일시적으로 명성과 부를 수상자에게 가져다줄 것이다. 그는 얼마동안 신문이나 TV에서 유명인사로 크게 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과 함께 모든 명성이 그러하듯이 이것도 시간이 좀 흐르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사라지고 잊혀질 것이다. 결국 그 뒤에 남는 것은 그의 작품이며, 이 작품의 가치가(그 속에 그런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면) 그의 이름을 오래 오래 이어갈 것이다. 노벨문학상을 포함하여 어떤 종류의 문학상도 애초에 그 속에 없는 작품의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작품의 가치는 노벨상을 타던 안타던, 노벨상을 타기 전이나 탄 뒤에나 변함이 없다. 진정한 작품의 가치는 문학상에 우선한다. 시인은 자기가 쓴 시가 보다 많은 독자들을 감동시키고, 진정으로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에 만족하고 행복해 해야만 할 것이다.
      (2006년 11월)        

추천204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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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유승석님의 댓글

06유승석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잘 읽었습니다 !

노벨상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네요.
특히 물음표료 쏘아붙이는 5번째 문단이 가장 통쾌하네요.

그런데요 마지막 문단에 '어떠 종류의 문학상도 애초에 그 속에 없는 작품의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라는
문장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봤는데요, 그게 사실 맞는말이긴 하지만
저처럼 문학을 잘 읽지 못하는 독자나 노벨상(혹은 다른 문학상)의 절대적인 가치를 믿고있는 사람에게는
다른 작품보다 뭔가 더 있어 보이는게 사실입니다.

가짜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는거죠 .
그러한 점에서 노벨상(문학상)은 오히려 작품감상에 방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노벨상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던 글이었고
시야가 조금 더 넓어진 것 같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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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국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상과 그 수상 작품이 잘 맞아떨어질 때는 상도 빛나고,
작가와 작품도 빛나고, 아주 이상적이지.

그런데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거지.
어차피 완전할 수 없는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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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세님의 댓글

이관세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내가 평생 안 한것을 자랑스러워 하는 것들;

1. 거짓말 같지만 라디오나 TV의 쇼 프로를 보지 않았다.
채널을 돌리다가 지나가는 수는 있었겠지만---

2. 스포츠신문을 사서 읽은적이 없다.
대기실 등에서 벤치에 놓여진걸 되도록 손 안댄채 읽거나 전철안에서 남이 읽는것을 곁눈질해서 본것을 제외하곤---

3. 담배는 딱 한갑(그것도 사슴이던가 6개피 들은 것)사봤다.
도서실에서 책 읽으면서 사색하는 폼 좀 잡으려다 한개비 정도 피고 그만둔 생각이 난다.
월남전에서 돌아온 친구녀석이 가져온 양담배를 뻐끔담배로 열심히 피워본 적은 있다.

4. 고은이의 시는 한 줄도 않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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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국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심하다.

나는 몇편 읽어보기는 했는데 도무지 기억에 남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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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일님의 댓글

최부일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오랜만이군요.
지난번 동창회에서 만나보려 했는데 많이 아펐다구요?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노벨상 조용히 타기를 읽으면서 또 한번 내 자신에게 회의를 느낍니다.

그렇게도 글 읽기를 좋아하고 책을 가까이 한다고 하는 제가 위장이었던, 거짓이었던
노벨문학상의 대상에 오르내렸던 문인도 모르고 있다니 내가 무식한건지 아니면 내 놓을 만한 작품의 주인공이 아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내 주위에 있는 친구, 후배, 선배들의 진솔하게 내뿜는 재치있고 기쁨을 선사하는 이야기들이 울적한 내마음을 환하게 웃음짓게 합니다.

9일날 양초회에서 만나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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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국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최부일 씨;

지난번 동창회에는 붛해하고 불쌍하게도 감기가 들어서 참석하지 못하였습니다.
최부일 씨를 비롯하여 수고하시는 분들에게죄송합니다.

그간 별고 없이 안녕하신지요? 그간 소식 전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글 읽고 또 한 말씀까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양초회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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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이종수님의 댓글

'95 이종수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교수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도 예전부터 노벨문학상에 대해 연례행사로 공중파를 탈 때마다 가끔씩 생각해 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노벨문학상의 한계라고나 할까요???
노벨문학상의 수상자를 선정하는 심사관들은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닐 것입니다. 한 명 정도 있을까?
또는 모두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라도, 우리 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있을 것입니다.
왜냐면, 한국 문학작품도 해석해서 이해해야 심사하겠죠?

여기서 언어의 한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학창시절 교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수필책(녹색 표지인데,
제목이 기억 안나네요. 죄송 ^^; ) 을 공부할 때 그속에 펼쳐진 너무나 멋있는 영문 문장들이 아직까지 제 뇌리를 스칩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ㅋㅋㅋ

그리고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 "ENGLISH는 미국이나, 영국만의 언어가 아니다... 세계 수많은 언어중에 영어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다......"
맞습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할 때 국어도 정말 아름다운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잠깐, 딴 길로 빠졌네요..

하여간, 영어를 국어로, 국어를 영어로 해석하여 제 3삼에게 이해시키는 행동. INTERPRETATION, TRANSLATION....
정말 죽도록 어려운 게 이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물며, 문학작품.... BETWEEN THE LINE을 느껴야하는 문학작품....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대한민국 사람들도 시, 소설등의 책을 읽을 때 느껴지는 느낌을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심사관들이 국문학 작품을 의역또는 해석하여 읽어보고 심사하는데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VICE VERSA.....

저는 우리 국문학 작품이 노벨문학상을 아직 타지 않은 것에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있습니다.
저들이 우리의 언어를 아직 잘 이해 못한다는 느낌때문에... 2007-01-05 16: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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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국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이종수 군에게;

졸업한지가 괘나 오래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강의시간을 기억하니(아마 영수필 시간이었을 꺼야) 신통하고,
참으로 좋은 문학작품의 힘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네.
은행원이 되어서 아직도 문학작품과 영어, 우리말 등을 논하고 있으니 전공은 어찌하지 못하는 모양이지?
계속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여 그 길에서 성공하기 바라며, 취미생활도(사진) 열심히 하고,

가정의 평화도 잘 이끌어 행복한 나날을 보내도록 하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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