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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TERARY WORKS


낚시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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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_write-s.png     며칠 전 나는 서재에서 별 생각 없이 책 한 권을 꺼내들고는 이내 추억 속에 빠져들었다. 요사이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도 걸핏하면 회상에 빠지는 일이 자주 있다. 아이작 월튼(Izaak Walton, 1593-1683)이라는 영국인이 쓴 『완전한 낚시꾼』(The Complete Angler)이라는 제목의 얄팍한 책이었다. 나는 이 책이 처음 어떻게 해서 나의 수중에 들어왔는지가 우선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샀는지도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신기한 일은 지난 봄 대학에서 정년퇴직을 하면서 이 책보다 더 유명하고 중요한 책들도 독한 마음먹고 거의 모두 처분한 이 마당에 이 책이 유독 몇몇 살아남은 책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이 책을 만지면서 이 책에 대하여 어떤 각별한 인연 같은 것을 느꼈다.

     이 책은 분명 영문학에 있어서는 하나의 작은 고전으로 되어있긴 하지만,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나 밀턴의 『실낙원』처럼 위대하지도 못하고 유명하지도 않은 작품이다. 우선 저자의 이름이나 작품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내용이나 주제도 거창하거나 심각하지 않다. 『완전한 낚시꾼』이란 책은 그 제목이 시사하듯이 낚시로 물고기 잡는 방법 내지 기술에 관한 책이다. 1653년 이 책이 처음 영국에서 출판되었을 때는 아예 낚시꾼들이 이 책을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도록 책의 크기를 손바닥만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후세의 독자들은 이 책을 낚시에 관한 실용적인 지식을 제공하는 지침서로 읽기보다는 이 책 속에 들어있는 잡다한 지식, 아름답고 신선한 시골풍경과 자연의 묘사, 그리고 순수한 문학작품이 항상 갖추고있는 간결하고 단아한 문장과 문체, 그리고 우리의 삶을 살찌게 하여주는 지혜와 교훈에서 변함없는 즐거움과 가치를 발견하고 있다. 이 책은 우리 나라에서도 이미 〈낚시〉라는 월간잡지에 우리말로 번역되어 연재물로 소개되었으며, 나중에 단행본으로도 출간된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그 동안 알고는 있으면서도 읽지는 않은 이 책을 이번에 한번 읽어보려고 책장을 몇 장 넘겨보다가 나는 이 책을 이미 오래 전에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읽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책장마다 여기 저기 잘된 문장들 밑에 붉은 볼펜으로 그어진 밑줄들이 이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처음에는 나 자신도 이런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언제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이처럼 정성스럽게 좋아하게 된 표현이나 내용 밑에 일일이 밑줄을 그어놓았는지 도저히 기억해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사람이 책 한 권을 모두 읽고 그 읽었다는 사실을 이처럼 까맣게 잊어버릴 수가 있는 일인가? 그리고 보면 사람의 기억력이란 것도 도시 믿을 수 없는 것이란 사실을 나는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이 밑줄 긋기야말로 나의 독서 습관에서 번연히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고질적인 나쁜 습관 가운데 하나다. 친구의 책을 빌려 읽으면서 책 주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대로 밑줄을 그어 놓고 돌려줄 때가 되어서 비로소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아예 같은 책을 새로 한 권 사서 돌려준 일도 나의 기억으로는 지금까지 두어 번 있었다. 그런데 나에게 있어서 밑줄을 긋지 않고 좋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마치 눈 덮인 길을 발자국을 내지 않고 걷는 것이나 다름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도서관에서나 또는 누구로부터 가능하면 가치 있는 책을 빌리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독자들이여, 낚시 이야기하다가 옆길로 새어나가 쓸데없는 밑줄 긋는 이야기로 독자들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게 만든 데 대하여 용서를 빕니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인지 걸핏하면 처음 하려던 이야기를 도중에 잊어버리고 이처럼 헤맨답니다. 나 자신도 어찌할 도리가 없군요. 자, 그러면 다시 정신 바짝 차리고 『완전한 낚시꾼』으로 돌아가 본래 이 글의 주제로 잡은 낚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그것도 남한강이 가로질러 흐르는 양평이란 강변 마을에서 보낸 나는 『완전한 낚시꾼』의 저자 아이작 월튼 씨에는 못 미치겠지만, 그래도 낚시에 관하여서는 한 마디 할 자격이 있다고 나 스스로 자부하는 바이다. 당시 우리 마을에도 아주 뛰어난 능력과 기술을 갖추고 있었던 낚시꾼들이 몇 분 있었으며, 나는 이들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어린 나이에도 언젠가는 이 사람들과 겨눌 수 있는 실력 있는 낚시꾼이 되어보겠다는 야심을 혼자 품어보기도 하였다. 실제로 나도 낚시로 강에서는 주로 피라미들을, 연못에서는 붕어들을 잡기도 하였다. 그 재미와 경험은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에도 결코 잊을 수가 없는 특별한 것이었다.

     지금도 가끔 나는 어린 시절 고향에서 낚시하러 가던 나의 모습을 그려보며 회상에 잠겨본다. 대나무 낚싯대를 어깨에 둘러메고, 한 손에는 고기 잡아 담을 조그만 바구니를 들고 강가로 나가,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아, 지렁이 미끼를 낚시바늘에 끼워 달아, 멀리 줄을 던져 놓고는 조용한 물위에 동동 떠 있는 찌를 바라보면서 가슴 조이며 조용히 기다리는 나의 모습을 그려본다. 월튼 씨가 그의 책에서도 말했듯이 낚시질에는 분명 시적 요소가 다분히 있다. 시가 그렇듯이 낚시질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갖게되는 지극히 자연적이면서도 본능적인 취향가운데 하나이다. 시가 그렇듯이 사람은 누구나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낚시질을 좋아하며, 또 하고싶어한다. 시가 그렇듯이 낚시질은 분명 물고기를 잡는 방법에 있어서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우리 동양화에는 자고로 낚시꾼은 마음의 평화, 명상적인 그리고 세속을 초월한 무위자연의 경지에 이른 욕심 없는 삶의 한 상징으로 그려져 있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는 세상이 변하면서 이 낚시의 본질도 급격하게 변해버린 것이 사실이다. 낚시는 이제 간단한 기술이 아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아주 복잡한 술어로 가득 찬 하나의 학문처럼 되어버렸다. 이제 낚시질을 하려면 예전처럼 대나무 막대기에 낚싯줄이나 걸어 가지고 나가서는 안 된다. 시작하기 전에 전문가로부터 많이 미리 배워야만 하고 또 공부를 해야만 한다. 낚시질은 이제 시가 아니고 하나의 스포츠다. 낚시질은 어느덧 하나의 개인적인 취미 내지 소일거리에서 발전하여 이제는 축구처럼 어렵고, 힘들고, 우리를 흥분시키는 일종의 단체 운동이 되어버린 느낌이 든다.

     낚시꾼들도 이제는 내가 한 때 그랬듯이 어린 소년이 아니며, 동양화에 등장하는 가난한 노인의 모습도 아니다. 이들은 제복을 입은 잘 훈련된 군인들 같이 보이거나, 아니면 최신무기로 무장한 특수부대 용사들 같아 보인다. 이들은 가난한 삶이나 한가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이들의 행동반경 또한 마을 연못가나 강가로 제한되어있지 않다. 이들은 차로, 배로, 때로는 비행기로 멀리 멀리 이동한다. 이들은 이들만을 위한 TV 채널도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 따른 아나운서, 전문가, 그리고 평론가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수시로 낚시 기술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또 우리 생활에 있어서 낚시꾼들의 중요성을 높이기 위하여  각종 대회를 개최한다. 한마디로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정작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은 다른데 있다. 요사이 낚시꾼들, 아니, 현대적 조사(釣士)들은 잡은 물고기를 아깝지도 않은지 도로 놓아준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어마어마하게 큰 고기를 애써 낚아 뭍으로 올려놓고는 우선 크기를 재어보고, 무게를 달아보고, 그 물고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감탄한 다음, 아무런 미련도 없이 그 물고기를 다시 물 속으로 놓아보낸다는 사실에 나는 그저 열려진 입을 다물지 못할 뿐이다. 어쩌면 이 사람들은 그렇게도 인자하고, 이기심이 없으며, 또한 자비스럽단 말인가? 나를 포함한 옛날의 미개한 원시적인 낚시꾼들로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때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물고기를 잡으면 그저 끓여서, 또는 구어서, 맛있게 먹을 줄만 알았다.

     그렇다. 나도 물고기를 낚는 재미를 잘 알고 있으며, 그 스릴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다. 작은 피라미를 낚아 올릴 때도 그런데, 하물며 엄청난 크기의 물고기를 잡아 올릴 때의 그 팽팽한 낚시 줄과 휘어져 꺾어질 듯한 낚싯대를 타고 전하여지는 그 스릴과 흥분, 아직 그 모습이 드러나지 않고 가끔 물 속에서 번쩍이는 물고기의 크기, 그리고 낚싯줄 끝에 매달려 딸려오지 않으려는 물고기의 필사적인 몸부림 - 이 즐거움을 과연 무엇에 비길 것인가?

     그런데 미안한 일이지만 물고기의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다. 딸려 나오지 않으려는 물고기의 필사의 저항은 낚시꾼에게는 비길 데 없는 큰 즐거움이지만 물고기로서는 사느냐, 죽느냐, 생사를 가름하는 고통과 절망의 몸부림이다. 물고기는 지금 자기를 끌어당기는 사람의 속마음을 알 리가 없다. 사투 끝에 기진맥진하여 뭍으로 끌려나온 물고기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몇 번 두드려주고 만져본 후 다시 물 속으로 놓아보낼 때, 그 물고기가 말을 할 수만 있다면, 과연 그 물고기는 그 동안 낚시바늘에 꿰어 몸부림치는 동안 엉망이 되어버린 아가리로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살려주어 고맙다고 할까? 아니면....

     그 멋진 낚시 장비와 기구들, 그리고 낚시에 관한 새로운 그 많은 지식과 정보들에도 불구하고 현대 낚시꾼들은 한가지 면에서 월튼 씨가 말한 “완전한 낚시꾼”이 되기엔 못 미치고 있다. 그것은 물고기를 잡아서 맛있게 먹을 줄 모른다는 것이다. 물고기를 잡아서 맛있게 먹겠다는 강력한 욕망이나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면서 단지 재미로 물고기를 잡는다는 것은 “완전한 낚시”가 아니다. 낚시꾼이라면 모름지기 잡은 고기를 요리하여 먹어야만 한다. 정 배가 불러 먹기 싫다면 시장에 내어다 팔아야만 한다. 그렇지도 않다면 물고기를 잡는 재미도 삼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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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은님의 댓글

박승은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

낚시꾼이라면 모름지기 잡은 고기를 요리하여 먹어야만 한다.
정 배가 불러 먹기 싫다면 시장에 내어다 팔아야만 한다.
그렇지도 않다면 물고기를 잡는 재미도 삼가야만 한다.

이 문단이 정말 좋습니다.
박승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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