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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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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이 드디어 집에 돌아왔네, 바다에서,

   사냥꾼이 마침내 집에 돌아왔네, 산에서" 

                                                        - 로버트 루이 스티븐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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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로서 내가 집에 돌아온 지 정확하게 두달이 지났다. 이렇게 말하니까 당신은 혹시라도 내가 그 동안 집을 떠나 멀리 어떤 곳에 상당히 오랜 시간 가 있었느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그런 일은 없다. 나는 약 20여 년 전에 현재 내가 살고있는 이 아파트로 이사를 온 이래 지금까지 거의 집을 떠난 적이 없다. 나는 나와 비슷한 나이의 이웃 사람들이 그렇듯이 아침에는 사무실에 출근을 해서 하루의 일을 마치고,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집에 돌아왔다. 저녁을 먹은 다음에는 별일이 없는 한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고, TV를 좀 보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생각되던 이 반복되는 일과는 두 달 전에 갑자기 중단되었다. 내가 정년이 되어 퇴직을 하였기 때문이다.

        나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나에게 정년이 다다오고 있다는 사실을 나보다 더 잘 알고있는 것만 같았다. 그 기한이 5년 이내로 접어들기 시작해서부터는 그 일이 중대한 자기 일이라도 되는 듯이 아예 "카운트 다운"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나는 알게 되었다. 교정에서 만남 동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나를 만나자 아주 걱정스런 표정으로 정년을 앞둔 나의 심정을 묻기도 하였다. 평소에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나와 헤어지기 전에 기어이 그리고 집요하게 나의 정년퇴직 년도와 날짜 까지를 정확하게 알아내고는 저으기 안도하는 표정으로 나를 놓아주기도 하였다. 이런 태도나 반응에 대하여 나는 별로 이상하다거나 서운해 하지 않았다. 실은 나도 이미 정년퇴직을 한 선배들에게 똑같은 약간 병적인 호기심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어느 정도 예측은 한 일이지만 어느 날 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퇴직은 그 동안 한결같이 지속되어 바위처럼 굳어져버린 나의 생활습관과 신체적, 정신적 태도, 심지어 인생관에서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필연적으로 크고 작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처음 며칠간 집에 있으면서 나는 내가 처하게 된 갑작스런 변화와 처지에 어리둥절하였다. 나는 애써 지금의 한가한 처지가 행복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내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마치 유한의 시간에서 갑자기 무한의 시간으로 튕겨져 나온 그런 기분이었다. 비좁은 공간에서 갑자기 광활한 자유의 들판으로 떠밀려 나온 느낌도 들었다. 좋은 것 같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였다.

        그 동안 이런 사태를 예측하고 나름대로의 수단과 방법으로 대비를 결코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나서 갈 곳이 없다는 간단하면서도 엄연한 현실은 퇴직 후 얼마간 적지 않게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당연히 사무실에 가 있어야 할 시간에 집에서 어정거리고 있다는 사실이 도대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내 앞에서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창피스럽기도 하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갑자기 새장에 갇힌 한 마리 새가 된 느낌이었다. 새장이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정작 지금까지 약 30여 년 이상 나를 가두어놓았던 새장은 집이 아니고 사무실이었다. 그 새장의 문은 이제 퇴직과 더불어 활짝 열렸고 나는 이제 높고 넓은 푸른 하늘로 글자 그대로 "새처럼 자유롭게" 훨훨 날아가게 되었다. 얼마나 갈망하던 시간이며 자유란 말인가? 그런데 나는 지금 어떤가? 열린 새장의 문 앞에서 오히려 그 새장 속의 생활을 못 잊어 그리워 서성이고 있는 한 마리의 새의 모습이 아닌가?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동안 집을 떠난 적이 없었다고 앞서 내가 한 말은 틀린 말인 것 같다. 사실 나는 그 동안 참으로 오랜 시간 집을 떠나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비록 아침에 출근을 했다가 저녁에 집에 돌아와 잠을 잤다 하더라도, 나의 마음과 정신은 항상 집을 떠나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나의 사무실과 그 곳에서 이루어지는 일에 매달려 있었다. 집이란 실제로는 잠시 머무르는 여관이나 다름없었다. 지금까지 나는 집과 가족들, 집안일, 이웃사람들에게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 온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곰곰이 헤아려보니 사실 나는 참으로 오랜 기간 -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하여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이후 지금까지 약 50여 년 간을 - 집을 떠나 있었다. 그동안 나의 황금같이 귀중한 시간과 젊음을 학교에서, 사무실에서 다 보내고, 머리가 허옇게 시어져 이제사 다시 집에 돌아온 것이다. 내가 내 집에서 내 집처럼 느끼지 못하고 남의 집에 들어 선 느낌을 받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아내가 나를 낯선 사람 바라보듯 하는 것도 이해 할만 하다.

        다행스럽게도 시간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우리들을 새로운 환경에 적응 시킨다. 이제 겨우 두 달이 지난 지금 나는 집안의 새로운 룰과 행동규범에 익숙해져있다. 아침이 오면 나는 예전처럼 큰 일을 하기 위하여 굳은 각오와 함께 미친듯이 사무실로 달려가는 대신, 아내가 챙겨주는 물통을 메고 동네 약수터에 가 물을 길어 오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군소리 없이 청소도 하고, 쓰레기통을 비우기도 하고, 가득 찬 쓰레기 봉투를 일정한 곳에 가져다 버리기도 한다. 손자들을 학교에 안전하게 데리고 가고, 데리고 오는 일도 어는듯 나의 몫이 되어버렸다.

        그 동안 아내도 한 지붕 밑에 살게된 나의 존재뿐만 아니라, 나를 적절히 부려먹는 일에도 아주 익숙해졌다. 시도 때도 없이 수퍼나 시장, 또는 약국에 가서 이런 저런 물건을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킨다. 나는 아무런 불만이나 불평없이 충실하게 그 명령을 이행한다. 끊일 새 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집에 이처럼 많은 전화가 걸려오는 줄을 나는 그동안 전혀 상상을 하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내가 먼저 받지 못하게 하더니, 이제는 으레 내가 먼저 받아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수화기를 아내에게 넘겨주는 것이 당연한 순서가 되어버렸다. 내가 전화를 늦게 받거나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나오는 날이면 즉시 아내로부터 호되게 야단을 맞는다. 나에게 걸려오는 전화는 거의 없다.

        이제는 집을 지키는 사람도 주로 나다. 아내는 아침부터 외출준비에 바쁘다. 친구들과 점심 약속이 있기때문이다. 지금쯤 아내는 고급음식점에서 친구들과 만나 신나게 수다를 떨고있을 것이다. 수다의 내용 가운데는 틀림없이 나처럼 퇴직 후 집에 남아있는 남편들의 흉을 보는 일도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크게 괘념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다 한철이니까. 나는 혼자서 점심을 간단하게 해결하고는 설거지까지 깨끗하게 해놓는다. 설거지도 자주하다보니 이제는 이력이 붙어 재미도 있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시간이란 것은 참으로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에 갇힌 짐승들이 그러하듯이 어는덧 나도 나의 새로운 울타리 속의 생활과 처지에 잘 적응하고 있다. 생활의 단조로움은 어느덧 나의 몸 속 깊숙히 배어들었다.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집안의 적막함이 가져다주는 행복을 맛보고있다. 나에게는 이제 바쁠 것이 없다. 낮잠도 자주 잔다. 하고 싶을 때 운동도 하고, 책도 읽고, 지금처럼 글도 쓰지만 전처럼 어떤 확고한 목적을 갖거나 의무감에서 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예전처럼 강렬한 즐거움이나 흥분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이미 해 볼만큼 해 보았으며, 맛 볼만큼 맛보았다고 생각한다. 주어진 많은 시간도 이제는 짐이 아니다. 시간을 요리하는 기술도 이제는 어느 정도 터득하였기 때문이다. 몸이 아파 누워있는 친구의 문병은 더 자주 갈 것이다. 가서는 전보다 더 오래 앉아있다가 올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나는 이제 이 세상에 나와 나에게 주어진 일은 모두 끝낸 셈이다. 이제부터 남은 날들을 나 자신만을 위하여 쓴다고 해서 누구에게 크게 비난받지도 않을 것이다. 크게 잘 못된 일도 아닐 것이다.
(2006. 4. 29.) 

추천291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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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은님의 댓글

no_profile 박승은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교수님 박승은 입니다. 두번 정독 했습니다. 모방체로 답글을 쓰다가 잘못 클릭되어 사라졌습니다..

교수님의 본 수필의 핵심어를 "시간"으로 하겠습니다.
다음주에 1건 읽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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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국님의 댓글의 댓글

이창국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박승은 과장,
역시 나의 글을 읽어주는 사람은 박과장 밖에는 없다니까. 하하하.
"주제"라는 말을 "핵심어"라고 하니까 더 신선한 느낌이 드는걸. 일거어주어 고맙네. 이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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