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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 이창국 [문화일보:2007.08.04자 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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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품에 대하여

황성규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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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와서 나는 남의 손목을 훔쳐보는 나쁜 습관이 하나 더 생겼다. 엘리베이터에 들어서거나 전철을 탔을 때면 나의 시선은 어느새 옆 사람의 왼쪽 손목에 가 있다. 내가 보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차고 있는 시계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시계의 상표다.


          이와 같은 약간 이상한, 좀 심하게 말해서 병적인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한 석달 전, 내가 난생 처음 거금을 주고 고급 손목시계를 하나 구입하고 나서부터다. 물론 지금까  지 시계가 없이 살아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남의 시계에 대해서는 물론 내가 차고 있는 시계에 대해 관심이나 흥미를 가져본 적은 없었다.


          내가 이번에 구입한 시계는 그 브랜드 이름이 비교적 잘 알려진 이른바 명품에 속하는 것이다. 이것을 사기로 결정하기까지는 오래 전부터 시계의 본고장 스위스에서 이 시계를 수입, 판매해 온 친구의 진지한 권고가 있었다. 나의 주머니 사정은 물론 나의 실용성 위주의 생활 태도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 친구는 만날 때마다 좋은 시계의 필요성을 넌지시 강조하곤 했다.


          “시계가 없어서가 아니라 좋은 시계 하나쯤은 가질 필요가 있지.”


          이 시계의 구입과 더불어 나는 많은 것을 새로 알게 되었다. 손목시계라는 것이 그처럼 잘 만들어진 완벽한 기계라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됐으며,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렇게 부드럽고 촉감이 좋을 수 없고,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한없이 귀엽고 아름다운 물건이란 사실을 지금까지 모르고 지낸 셈이었다.


          그뿐인가. 세상에는 나같은 사람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엄청난 가격의 시계가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이런 시계에 대한 사람들의 열렬한 애정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는 이런 이름난 시계를 가진 사람들이, 그런 시계를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새로 산 비싼 시계를 차고 있으면 기분이 좋을 뿐만 아니라 힘이 생기고, 마음의 안정을 느낀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나를 비웃거나 경멸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것을 어찌하랴. 나의 새 시계는 전에 내가 차던 것들에 비하면 단연 더 두껍고, 무겁고, 크다. 시곗줄도 수갑을 연상시키는 묵직한 쇠로 된 고리줄이다. 나도 처음에는 이것이 좀 무겁고 투박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곧 익숙해졌으며, 이제 와서는 그것이 손목에 없으면 오히려 허전하고 불안하기조차 하다. 며칠 전 일이다. 아침 출근을 하기 위해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호등에 막혀 잠시 정지한 사이 나의 왼쪽 손목에 감겨 있는 시계를 보고 가슴이 철렁함을 느꼈다. 그것은 새로 산 그 듬직한 시계가 아니라 시곗줄이 인조 가죽으로 된 얄팍하고 가벼운 시계였다. 나는 차를 돌려 다시 집으로 돌아가 기어이 새 시계로 바꾸어 차고 출근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외출할 때마다 이 고가의 귀중한 시계를 착용하는 것은 아니다.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는 장소나 행사에 참석할 때는 서랍에서 선물로 받은 여러 개의 시계들 가운데서 아직도 배터리가 다되지 않아 제대로 시간을 맞추고 있는 놈을 하나 골라 차고 나간다.  

 

나의 "명품시계"는 넥타이, 와이셔츠와 더불어 상대방은 물론 나 자신에 대한 예절, 존경심, 마음의 준비성 등을 나타내는 하나의 부적처럼 돼버렸다.


          이왕 바보같은 이야기를 꺼낸 김에 망신 당할 각오하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하겠다. 나는 이 시계를 차고부터는 일종의 우월감을 느끼고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이 우월감이란 것은 결코 이 세상에 존재하는 흔하고, 현실적이고, 또 유용한 물건에 대한 무시나 소홀, 또는 경멸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이 감정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 가운데서 진정으로 훌륭하고 좋은 것, 잘 만들어진 것, 가치 있는 것에 대한 깊은 이해와 감상, 그리고 애정에서 나온 것이다. 파리 루브르미술관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모나리자’ 앞에 처음 섰을 때, 바티칸대성당에서 미켈란젤로의 조각품 ‘피에타’를 두 눈으로 직접 보았을 때 느낄 수 있는 그런 느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나도 이런 진품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화집에 나와 있는 이들의 사진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나에게 이런 명품을 사도록 끈질기게 권유한 친구가 없었더라면, 그리고 무엇보다 이 친구에 대한 나의 절대적인 신뢰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나의 이 명품시계 구매는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다. 돈만 있다고 명품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명품의 세계에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진위를 구별하기 힘든 가짜가 존재하게 마련이다.


          엄청난 액수의 돈을 지불하고 손에 넣은 명품이 나중에 가짜로 판명 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본다. 가지고 있는 명품이 과연 진짜인지, 가짜인지 항상 전전긍긍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다. 가짜인지 뻔히 알면서도 진품이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다. 가짜 명품의 시장이 전 세계적으로 성행하는 현상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지금 나의 절친한 친구 한 사람을 어떻게 해서든지 내가 구입한 것과 같은 시계를 하나 구입하도록 열심히 구워 삶고 있다. 이 친구도 부자는 아니지만 마음만 먹으면 하나 장만할 만도 한데 계속 버티고 있다. 내가 “사람이 좋은 시계 하나쯤은 있어야지”라고 말문을 열면, 이 친구 곧바로 자기가 차고 있는 손목시계를 힘차게 나의 코밑에 흔들어대면서 열을 올린다.


      “ 이 시계가 어때서? 시계란 시간만 잘 맞으면 되는 것 아닌가? 무엇 때문에 그 큰돈을 쓸데없이 낭비한단 말인가. 집에 가면 이런 시계가 열 개는 더 있는 걸.”

       이런 말을 하는 친구를 나는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정확하게 바로 석 달 전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창국 / 중앙대 명예교수·영문학]


원본 바로가기 :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08040103223719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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